서울 한남동에 '현대카드 아트 라이브러리' 개관
‘공간주의’ 예술 사조 제창자로 미술사에 이름을 남긴 화가 루치오 폰타나(1899~1968년)는 캔버스를 뚫거나 찢어내는 작품으로 조각과 회화의 경계를 깨뜨렸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네온 조명과 텔레비전(TV) 등 과학기술을 적극 활용했다. 뭇사람의 눈길만 끌려는 수작이 아니었다. 움직임과 색은 물론, 시간과 공간까지 통합하는 새로운 예술을 선보이려는 시도였다. 그가 1966년 출판한 ‘공간 개념(conetto spaziale)’ 역시 남다르다. 펀치로 구멍을 낸 금빛 종이를 아코디언처럼 접어서 만들었다. 책의 형태를 빌린 예술품 ‘아티스트 북’이다. 200부만 제작된 이 책을 지금 한국에서 펼쳐볼 수 있다.
아티스트 북을 비롯해 비엔날레 도록, 미술계에서도 비대중적인 잡지까지 현대 미술 서적 6,000여 권을 소장한 ‘현대카드 아트 라이브러리(미술 도서관)’가 지난 9일 서울 한남동에서 문을 열었다. 현대카드가 운영하는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다이브(DIVE) 회원이면 무료로 입장할 수 있는 초소형 도서관이다. 희귀본을 비롯해 장서 대부분이 실제로 서가에 비치돼 열람이 가능하다. 기업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탄생한 공간이지만 독자들에게는 미술 정보를 접하는 문이 하나 더 열린 셈이다.
아트 라이브러리는 이태원로 번화가 2층 건물의 위층을 차지하고 있다. 위층 전체가 열람실이다. 최근 방문한 열람실에서는 스케치북처럼 커다란 도록을 책상에 펼쳐 놓고 공책에 내용을 옮기는 열람객들을 찾아볼 수 있었다. 뉴욕 현대미술관 큐레이터, 독일 슈테델슐레 예술대학장 등으로부터 자문을 받아서 선정한 장서는 회화·조각, 드로잉·판화, 사진, 미디어·퍼포먼스(행위예술), 아트 일반, 정기간행물 등 크게 6개 장르로 분류됐다.
희귀한 책을 전시하는 공간도 마련됐다. 열람실 입구에는 작가가 직접 기획하거나 제작한 아티스트 북 40여 권이 전시된다. 세계 지도책에서 중동이 나오는 페이지를 칠하고 또 잘라내 국가들을 추상적 관념으로 표현한 아니시 카푸어의 ‘터닝 더 월드(Turning the world, 2005년작)’부터 기하학적 도안이 돋보이는 디터 로트의 ‘칠드런즈 북(Children’s book, 1957년작)’ 등 30권의 제작되지 않은 책들을 만나볼 수 있다. '터닝 더 월드'(4,000여만 원)와 '공간 개념'(3,000여만 원)은 가격이 가장 비싼 소장품이다. 절판된 유명한 이론서나 작가의 서명이 담긴 책 등 희귀본 600여 권도 따로 전시된다. 다만 전시 공간이 좁아 일부는 돌아가면서 전시될 예정이다.
‘전권 컬렉션’은 도록이나 잡지의 발행본을 모은 코너다. 뉴욕 현대미술관이 1929년 개관한 후 개최한 모든 전시의 도록 710권을 비롯해 베니스 비엔날레가 시작된 1895년부터 지금까지 선보인 본전시 카탈로그 98권을 볼 수 있다. 독일 카셀 도큐멘타 자료집들도 함께 비치돼 있다. 이 밖에 ‘무빙 이미지 룸’에선 1960, 1970년대 미디어·퍼포먼스 작품을 컴퓨터를 통해 검색하고 열람할 수 있다. 실연 영상을 찾아보기 어려운 해외 작품들을 감상할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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