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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콘 상사

입력
2022.08.30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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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ENA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정명석 변호사를 연기하는 배우 강기영. 방송 영상 캡처

ENA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정명석 변호사를 연기하는 배우 강기영. 방송 영상 캡처

입사 초 내가 제일 많이 들은 소리는 "기자 같지 않다"였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기자는 속은 물론 겉보기에도 세고, 열정 넘치고, 당찬 사람인데 나는 그렇지 않았다. 내 멘털은 툭하면 부서졌다. 선배가 전화기에 대고 소리치면 머릿속이 새하얘지며 말문이 턱 막혔고, 취재원의 안타까운 사연에 덩달아 울기 일쑤였으며, 항상 긴장하고 있었던 탓에 목소리가 자주 떨렸다.

나름 어려서부터 언론인을 꿈꿨고, 언론인이 되겠다는 열망 하나로 대학 전공도, 동아리 활동도 모두 그 길에 맞춰왔기에 입사 후 겪은 실패와 좌절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취업 준비 때 맛본 세상의 냉혹함은 차라리 다정했다. 합격만 하면 잘할 수 있을 거라던 근거 없는 자신감도 빠르게 자취를 감췄다.

그런 나에게도 드라마 '우영우' 속 정명석 같은 유니콘 상사가 있었다. 수도 없이 때려치우고 싶은 많은 순간에 직면하면서도 올해 입사 9년 차를 맞이한 건 8할이 그들 덕분이다. 그들은 모난 돌인 나에게 "괜찮다"는 한마디로 일관했다. 실수하고 난 뒤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부여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해 고해성사를 해도, 기사를 한 번에 휘리릭 잘 써내지 못해도, 혼나다 지쳐 울어도 "괜찮다"고 했다. 다른 이들이 "그렇게 약해빠져서 기자 어떻게 할래"라고 다그칠 때 그들은 달랐다. "너에겐 좋은 기자가 될 자질이 있다. 괜찮다"고 했다.

그 한마디가 나에겐 '봄날의 햇살'과 같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 속에 갇힌 것 같던 내게 그들은 한줄기 빛을 보여줬다. '이 길이 아닌가 보다' 하고 돌아서려 했을 때도, 자존감이 땅을 파고 들어가다 못해 산산조각 났을 때도 그들은 함부로 다그치거나 비난하지 않았다. '사이다'를 가장한 직설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기다려주거나 "괜찮다"고 다독여줄 뿐이었다.

하지만 이 선배들이 유니콘인 이유가 단순히 내 편이 되어줘서만은 아니다. 그들은 사람 같지 않은 사람, 비상식적인 상황 앞에서 '사는 게 다 그래' 하고 대충 넘어가기보다 거듭 놀라고, 그러면 안 된다고 거듭 지적하는 사람들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분명하게 알고 있었으며, 자신과 타인의 생각이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고 합의점을 찾아가는 데 익숙했다. 무엇보다 후배를 자신의 틀에 억지로 끼워 맞추기보다 제각각에 맞는 틀을 찾아가도록 길을 안내해 주는 데서 뿌듯함을 느끼는 사람들이었다. 자신의 부족함까지 들춰내가며 후배를 다독이는 인간미는 물론, 후배가 당한 부당함에 본인이 먼저 앞장서 주는 용기도 갖췄다. 주변 대부분의 사람이 그들을 좋아하고 존경하는 이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살면서 이런 사람을 만나는 건 쉽지 않다. 우리 주변엔 누가 봐도 권모술수 권민우인데 봄날의 햇살 최수연인 척하거나 윗사람들에겐 봄날의 햇살, 후배들에겐 권모술수인 사람이 훨씬 많다. 이들은 자신을 정의로운 봄날의 햇살이라 착각하고 있기에 배려를 가장한 위선도 서슴지 않는다.

당신은 어떠한가. 만에 하나 지금 이 글을 읽고 문득 '난 유니콘 상사야' 혹은 '난 봄날의 햇살이야'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그러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마치 꼰대 기사를 읽고 난 꼰대가 '나는 아니겠지'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진짜 유니콘 상사라면 묵묵히 스스로를 돌아보고, 나는 어떤 사람인지를 깊게 고민하고 있을 테다.

김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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