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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막 대하면서 자식에겐 '효도 강요' 하는 부모님 ...그럴 자격 있나요

입력
2022.08.29 04:30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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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정우열의 회복’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정우열 원장이 <한국일보>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일러스트=박구원 기자

일러스트=박구원 기자

저는 결혼해 독립한 30대 직장인입니다. 조부모님을 함부로 대하는 부모님이 저에게는 효도를 요구해 너무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 있는 할머니를 찾아보기는커녕 만나지도 못하게 하는 부모님에게 나는 '자식 도리'를 다해야 하는지 의문이 듭니다.

저희 부모님은 원래 조부모님과 사이가 나빴습니다. 어린 시절 제 눈에는 부모님이 조부모님을 소홀히 대하다 못해 함부로 대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부모님은 조부모님뿐 아니라 다른 형제들과도 왕래 없이 살았고, 집안 분위기는 늘 좋지 않았습니다.

자식과 교류가 뜸했던 할머니는 아버지와 갈등이 생길 때마다 그대로 연이 끊길까봐 걱정하시며 제가 다니는 학교에 찾아오시곤 했습니다. "아빠는 미워도 너희들은 밉지 않다, 누가 뭐라 해도 너는 내 손주다"라고 하시면서 용돈도 챙겨주셨죠. 언젠가 그 사실을 아버지가 알고 나서 할머니에게 크게 소리를 치며 무례하게 대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지금 할머니는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 계시지만 부모님은 한 번도 찾아간 적이 없습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한 번만이라도 찾아보고 싶은데 요양원이 어디인지 물어도 절대 알려주지 않습니다. 조부모님과 부모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아버지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조부모님에 대해 언급하는 것 자체를 싫어하시고 사연을 물어도 알 필요가 없다며 오히려 역정을 내십니다.

제가 힘든 건 그런 부모님이 저에게 자식 된 도리를 하길 원한다는 겁니다.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결혼해 독립한 저에게 부모님은 전화를 걸어 "연락이 왜 없냐" "왜 집에 오지 않냐" "부모를 모르는 애가 사회 나가서 뭘 할 수 있겠냐" 등 온갖 핀잔을 쏟아냅니다.

두 분은 제가 무뚝뚝하고 무심한 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제 행동이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 들면 불만을 쏟아내고 버럭 하는 부모님을 볼 때마다 너무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부모님의 얘기를 혼자 생각하다 보면 잘해야지 싶다가도 정작 부모님을 대면하는 게 어색하고 불편해서 피하게 됩니다. 부모님은 지난 어버이날에도 어김없이 "내가 살아있을 때 효도해라, 죽고 나서 후회하지 말고", "키워준 게 얼만데 모른 척 하는거냐"며 성토하셨습니다. 그때마다 '자기 부모에게 불효하면서 자식에게 효도를 받을 자격이 있나'라는 원망만 커집니다. 부모님과 마주하는 게 불편하다 보니 전화 통화는 물론이고 어버이날, 생일 같은 가족 행사가 다가올 때마다 마음이 불안합니다.

부모님은 남아선호사상이 유독 심했습니다. 아들이 귀한 집안이라 내리 셋째 딸인 제가 태어났을 때 슬픔의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 후에 남동생이 태어났을 땐 세상에서 가장 기뻤다고 공공연하게 말합니다. 저는 어린 시절 부모님의 사랑을 느껴보지 못한 채, 무관심과 방치 속에서 외롭게 자랐습니다. 그 때문인지 성인이 됐을 때 누군가 제게 잘해주기라도 하면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왜 잘해주지'라고 생각이 들어 자꾸 밀어내기 바빴습니다.

연로해진 부모님을 보면서, 더 이상 실망시키면 안 된다는 생각에 잘하려고 하다가도 제가 부모님을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상기될 때마다 저의 행동이 가식으로 느껴져 괴롭습니다. 무관심 속에서 자식을 키우고, 정작 자기 부모에게 불효자인 부모님은 저에게 어떤 방식으로 효도받기를 바라시는 걸까요. 효도라는 건 뭘까요.

이선영(가명·35·직장인)

선영씨, 일단 다른 이에게 꺼내 놓기 힘든 어려움을 저에게 털어놔줘서 고맙습니다. 사연만으로 당신의 인생을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선영씨의 어린 시절 아픈 마음이 충분히 느껴지면서 제 마음도 아팠어요.

선영씨의 고민만 놓고 보면 조부모님에게 효도하지 않으면서 자식에게 효도를 강요하는 부모님의 태도가 문제인 것 같지만, 선영씨 마음이 힘든 근본적인 원인은 부모님과의 '관계' 문제인 것 같아요. 1차적으로 부모님이 조부모님을 대하는 방식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는데 어려서 부모님의 사랑과 관심을 충분히 경험하면 성인이 된 후 정서적 독립이 잘 되고, 그렇지 않으면 서로 영향을 지나치게 많이 받아 상처를 주고받게 됩니다. 제가 보기에는 선영씨는 부모님으로부터 정서적인 독립이 아직 잘 이뤄지지 않은 것 같아요. 정작 중요한 정서적 관계 문제를 건드리지 못하고 형식적인 행동을 기준으로 ‘효도’를 거론하며 서운한 이야기만 하다가 마음의 갈등이 해결되지 않고 악화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자식의 도리를 생각하기 전에 먼저 선영씨의 감정에 대한 이해부터 해봅시다. 선영씨는 결혼 후 독립하기까지 부모님과의 관계가 편안하지 않았죠. 어린 시절 부모와 맺은 관계가 인간관계의 패턴을 결정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누군가 잘해줘도 그 사람의 마음을 의심해 호의를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얘기로 추정컨대 어린 시절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한 경험이 이후 선영씨 삶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 온 것 같아요. 인간관계에서도 지나치게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고, 자기 마음을 표현하지도 못하는, 타인 지향적인 성향을 갖게 된 것이죠.

부모님과의 관계도 그랬을 거예요. 부모님은 선영씨에 대한 불만을 가감 없이 이야기하고 있어요. 반면 선영씨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부모님의 한마디 한마디에 눈치를 보고 관계가 깨질까봐 불안해합니다. 부모님께 참 많이 실망했으면서도, 정작 부모님을 더 이상 실망시키면 안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고 그대로 행동하는 게 그 증거죠. 부모님으로부터 안정적으로 독립된, 즉 자아 분화가 잘된 사람이라면 효도하라는 부모님의 요구에 대해 자신의 서운함이나 의구심 등을 솔직하게 표현하거나 때로는 되받아칠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선영씨는 이렇게 하기보다는 '내가 무엇을 바꿔야 하지?'라며 속으로 끙끙 앓고 있죠.

부모님에게 여전히 인정받고 싶은 선영씨는 부모님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을 거예요. 하지만 이를 따르기에는 어린 시절의 서운한 감정이 너무 버겁습니다. 그렇다고 외면하려고 하면 선영씨는 자식의 도리를 저버리는 나쁜 사람이 되는 것 같아 두렵죠. 더 근본적인 두려움은 부모님께 지금이라도 인정과 사랑을 받을 기회를 아예 날려버릴지도 모른다는 것이고요.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부모와 자식의 관계란 뭘까요. 분명한 건 건강한 부모 자식 관계는 '효도'라는 굴레에 휘둘리는 관계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자신의 마음과 상관없이 과도하게 노력하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관계 맺기죠. 부모님이 섭섭함을 표현해도 자기가 감당할 수 있을 선을 지키는 것이 건강한 관계를 만드는 단초입니다.

일단 오랜 시간 억눌려 있던 내면을 드러내는 연습을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우선 '내가 느끼는 감정은 100% 맞다'는 인정을 해주세요. 자녀로서 부모에 대해 양가적인 감정을 갖는 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부모의 어떤 면은 싫어하면서도 동시에 사랑받고 싶어합니다. 선영씨 내면에는 부모님으로부터 충분한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해 생긴 원망과 미움이 있어요. 부모님의 사랑은 여전히 선영씨 자신에겐 중요하고 필요한 대상입니다. 부모에게 자식의 도리를 해야 한다는 선한 명분으로 억지로 감당해내려고 했던 선영씨의 태도는 본질적으로 부모로부터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로부터 나온 것이죠. 그렇게 시작한 효도는 겉으로 보면 자의적인 것 같지만 본질적으로는 타인 지향적인 행동입니다.

부모님의 사랑과 이해를 바라는 데서 비롯된 효도겠지만, 그렇게 해도 선영씨의 결핍감이 근본적으로 해소되진 않을 겁니다. 불안이 잠시 해소되는 느낌뿐이죠. 선영씨 부모님의 입장을 헤아려보건대 조부모님과의 관계에서 겪은 아픔으로 인해 자녀와의 관계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 효도에 집착하는 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는 선영씨가 헤아리고 해결해야 할 것이 아니라 부모님의 사정인 것이죠.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자기 삶을 주도적으로 살아갈 힘을 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선영씨와 부모님 사이의 좋은 기억과 안 좋은 기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들의 인생에서 선영씨를 분리해야 해요. '자기 부모를 함부로 대하고 자식을 사랑하지도 않은 사람이 어떻게 효도를 기대하지?'라는 불만은 부모 중심의 생각입니다. 여기서 '내 부모는 미성숙한 태도로 부모와 자식을 대했지만 나는 그렇게 살지 않고,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할거다'라는, 나를 중심에 둔 생각으로 방향을 바꾸는 겁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실질적인 조언은 '거절하는 연습'입니다. 당장은 단호하게 의사 표시를 하는 것이 힘들다면 은근한 저항도 좋습니다. 반사적으로 적극 반응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소극적으로 반응하기, 끌려가지 않고 그냥 그 자리에 멈춰 있기부터 시작해보세요.

선영씨, 사연을 읽으면서 그동안 사랑받고 싶어 얼마나 애썼는지 느껴졌어요. 선영씨는 이미 부모님을 포함한 인간관계에서 갈등이 있을 때마다 자기 자신을 성찰하려고 노력해왔습니다. 그 자체가 훌륭합니다. 다만, 자기 자신을 탓하는 방향이 아닌 자기편이 되어주는 방향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당신이 느끼는 모든 감정은 전적으로 옳습니다. 그 확신으로 꿋꿋이 자신의 삶을 살아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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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손효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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