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정권들 노동개혁 때 '단골손님'
2000년대 초 독일, 2022년 한국은 다른 게 문제
"개혁 정신과 노력은 배울 점도 있어"
"독일에서 사민당이 노동개혁을 하다 정권을 17년 놓쳤다고 한다. 그러나 독일 경제와 역사에 매우 의미 있는 개혁을 완수했다. 노동도 현실의 수요에 맞춰 유연하게 공급돼야 하는 측면이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17일 진행된 취임 100일 기념 기자회견에서 노동개혁과 관련한 질문이 나오자 독일 이야기부터 꺼냈다. 2000년대 초반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와 사민당 내각이 추진한 '하르츠 개혁'을 롤모델 삼아 노동시장 개혁을 추진하겠다는 의지로 해석된다.
하르츠 개혁은 이전 정부에서도 노동개혁 얘기가 나올 때마다 소환됐다. 2015년 박근혜 전 대통령은 자신이 제시한 '고용률 70%' 공약의 모범사례로 하르츠 개혁을 들었고, 노동개혁 필요성의 근거로 독일 사례를 자주 인용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도 2018년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출범식에서 노사정 대타협의 사례로 이를 언급했다. 사실상 역대 정권의 교과서처럼 여겨진 셈인데, 전문가들은 배울 점이 있긴 하지만 우리 현실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지적한다.
우리나라 문제 근본적 진단부터
18일 노동계에 따르면 하르츠 개혁은 대표적인 노동시장 유연화 개혁이다. 2002년만 해도 실업률이 두 자릿수였던 독일이 이를 통해 회생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문제는 하르츠 개혁 방식을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당시 독일의 사회문화적 배경과 현재 우리가 당면한 현실이 매우 다르다는 데 있다. 갑작스러운 통일과 세계화 과정에서 2000년대 초 독일 실업률은 두 자릿수로 뛰었고, 서독에서 발달한 사회복지 제도로 일자리 정체가 심했다. 신자유주의 물결이 전 세계에 퍼지던 시대적 상황도 한몫했다.
박명준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독일이 처했던 맥락 속에서 답을 찾기 위한 노력이 하르츠 개혁이었다"며 "당시 하르츠 위원회가 강조한 건 '그 어떤 나쁜 일자리라도 실업보다는 낫다'는 식의 생각이었는데, 그때와 지금 우리 사정은 완전히 다르다"고 설명했다. 이미 비정규직 비율이 지난해 기준 43%로 세계 최고 수준인 데다, 고용보험이 독일만큼 완비돼 있다고 보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하르츠 개혁 방식을 따르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박귀천 이화여대 로스쿨 교수는 "하르츠 개혁 이후 독일에선 저임금 노동자 문제가 대두됐다"며 "안 그래도 양극화가 심각한 한국에서는 근로 빈곤층 문제가 더 심화할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우리 노동시장에 대한 근본적이고 총체적인 진단이 선행돼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박 연구위원은 "근로시간과 임금체계 논의에 매몰될 게 아니라 산적한 노동시장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향의 개혁 틀을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교수도 "하르츠 개혁은 노동뿐만 아니라 교육, 사회, 연금 등 사회 전반을 망라한 개혁이었다"며 "노동법 몇 가지만 떼어 개혁하는 방식은 더 이상 작동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하르츠 개혁의 '내용' 말고 '겉'이라도 배워야
다만 하르츠 개혁이 취했던 형식만큼은 차용할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개혁 추진 과정에서 슈뢰더 내각이 실각했지만 당시 야당이었던 메르켈 내각이 뒤를 이어 개혁을 완수하고 보완하면서 정권 간 타협과 연합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최영기 한림대 객원교수는 "정권이 정치적 희생을 감수하고 '해야 할 일을 했다'는 긍정적 평가를 할 수 있다"며 "전문가 합의안을 기본으로 정부가 밀고 가면서 어느 정도 노사 합의까지 끌어낸 세련된 개혁 방법론을 택했다는 점에서도 이번 정부가 배워야 할 부분이 있다"고 설명했다.
결국 '한국형 개혁'을 만들 필요성이 제기된다. 최 교수는 "독일은 노사가 잘했다기 보다는 여야가 잘한 건데, 정치적 양극화가 심한 우리나라에서는 독일 모델을 그대로 적용하긴 어렵다"며 "다만 노사정위원회나 사회적 대타협 사례에서 보듯 성사되기 어려워 보이는 제도도 시도하다 보면 우리만의 모형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개혁의 정신과 형식은 귀감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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