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1960년대 미역 따던 해녀 4명
팔순 넘겨 다시 독도 방문
독도 개척·수호자로 재인식 계기 마련
"독도야 잘 이서시냐(있었느냐). 다시 오난(오니) 눈물 남쩌(나네).”
18일 오전 11시 경북 울릉군 독도 선착장에 갑자기 제주 방언이 들려왔다. 제주 해녀 34명이 울릉도 사동항에서 3시간 뱃길을 달려 독도에 도착한 것이다. 이 중 1950~1960년대 독도에서 물질을 했던 김공자(82)씨와 임영자(87)씨 등 4명의 해녀들이 포함돼 눈길을 끌었다.
60여 년 전, 우리나라 동쪽 끝 독도 앞바다에서 거친 파도에 맞서 물질을 하던 제주 해녀들이 팔순을 넘겨 다시 독도 땅을 밟았다. 경북도와 제주도가 독도 영토주권 강화 차원에서 당시 제주 해녀들의 개척사를 재조명하는 사업에 뜻을 모으면서 이들의 방문이 이뤄졌다.
이날 독도 선착장에 발을 내딛은 김씨는 "19세 되던 해 처음 독도에 와서 서도 물골 쪽에 가마니로 임시 숙소를 지어 생활하며 미역을 주로 땄다"며 "그때는 온통 물개(강치) 천지였는데 10년 전쯤에 다시 와 보니 물개는 한 마리도 없고 시설도 많고 엄청나게 변했다"고 말했다. 27세에 독도에서 물질을 했다는 임씨도 “바닷속에서 채취한 미역을 섬 한쪽에서 널어 말린 뒤 팔거나 제주도로 실어 갔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당시 해녀들은 오직 미역만 채취했다. 요즘 독도 인근 수산물로 인기가 높은 전복과 해삼, 독도새우 등은 활어 상태로 운송이 어려웠을 뿐 아니라 당시에는 소득수준이 낮아 고가의 해산물을 많이 취급하지 않고 미역에만 초점을 맞췄다.
날씨가 거칠기로 유명한 독도에서의 물질은 해녀들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독도에서 유일하게 민물이 솟는 서도 물골에 가마니로 만든 임시 숙소를 만들어 수십 명이 함께 생활했다. 해녀들은 이른 봄부터 2, 3개월 정도 이곳에서 생활하며 미역을 따고 널어 말리는 생활을 반복했다.
제주 해녀들이 독도를 찾은 건 일제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독도의용수비대가 독도 사수를 위한 경비 마련 차원에서 제주 해녀를 모집했다. 수시로 순시선을 보내는 등 호시탐탐 독도 침탈을 노리는 일본에 맞서기 위해서였다.
이 때문에 제주 해녀들의 당시 활동은 수산물 채취를 넘어 지역 어업권 확보와 이를 통한 독도 영유권 사수에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제주에서도 특히 한림지역 해녀들이 주로 독도를 찾았고, 실제 한림읍 협재리 마을회관에는 1956년 건립된 ‘울릉도 출어부인 기념비’가 이들의 활동상을 입증하고 있다.
이날 해녀들과 독도를 방문한 오영훈 제주지사는 "70여 년 전 제주 해녀들이 독도까지 와서 물질을 한 기록이 있고 당시 독도에서 조업을 한 해녀 네 분과 함께 독도를 방문했다"며 "독도 영토의 실효적 지배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제주 해녀의 강인한 정신을 대한민국 곳곳에 알리는 소중한 계기여서 더욱 뜻깊다"고 밝혔다. 오 지사와 김공자씨는 이날 울릉군으로부터 독도명예주민증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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