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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의 방주가 일깨운 강남 침수 사태

입력
2022.08.11 19:00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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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지
김선지작가

노아의 방주를 실감나게 그린 르네상스 프레스코화

아우렐리오 루이니, '노아의 방주'(오른쪽 벽화), 1556년경, 산 마우리치오 알 모나스테로 마조레, 밀라노, 이탈리아

아우렐리오 루이니, '노아의 방주'(오른쪽 벽화), 1556년경, 산 마우리치오 알 모나스테로 마조레, 밀라노, 이탈리아

그림은 불길한 잿빛 하늘 아래 세상을 삼킬 듯 광포하게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인간과 동물이 물살에 휩쓸린 채 사투를 벌이는 아비규환의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이미 익사한 시신들은 물 위에 둥둥 떠 있고, 스와들링(Swaddling, 아기 속싸개)에 꽁꽁 싸인 채 요람에 누운 아기와 소, 말, 개 등의 가축들이 떠내려가고 있다. 화면의 오른쪽 아래 푸른 옷을 입은 남자가 아직까지는 수면 위로 솟아 있는 좁은 땅 위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 그의 양쪽에는 한 남자가 땅 밖으로 드러난 나무뿌리를 필사적으로 움켜쥐고 있고 다른 남자는 부러진 나무토막에 속절없이 매달려 있다.

16세기 베네딕토회 수녀원 '산 마우리치오 알 모나스테로 마조레'(San Maurizio al Monastero Maggiore)는 아름답고 화려한 벽과 천장 프레스코화로 인해 '밀라노의 시스티나 예배당'으로 불린다. 수도원에는 창세기 홍수 설화 '노아의 방주'를 세 가지의 다채로운 이미지로 묘사한 벽화가 있는데, 위 작품은 그중 맨 오른쪽에 위치한다. 당대 밀라노의 유명한 화가 아우렐리오 루이니(Aurelio Luini)가 그린, 이 수도원의 보물 같은 예술품들 중 하나다.

베네딕토회 수녀원 산 마우리치오 알 모나스테로 마조레의 '노아의 방주' 주제의 세 그림

베네딕토회 수녀원 산 마우리치오 알 모나스테로 마조레의 '노아의 방주' 주제의 세 그림


산 마우리치오 알 모나스테로 마조레의 '노아의 방주' 왼쪽 벽화와 중앙의 벽화(오른쪽)

산 마우리치오 알 모나스테로 마조레의 '노아의 방주' 왼쪽 벽화와 중앙의 벽화(오른쪽)

중앙의 벽화는 노아 가족과 유니콘, 원숭이, 기린 등 지상의 모든 짐승이 한 쌍씩 짝을 지어 거대한 방주에 들어가는 장면이다. 화가는 동물 중에 자신이 기르는 개도 그려 넣었다. 왼쪽 그림은 대홍수가 끝난 후의 세상을 묘사한다. 하늘엔 무지개가 뜨고 방주는 땅 위에 정박해 있다. 배 밖으로 나와 육지에 발을 디딘 노아와 그의 세 아들이 보인다. 곳곳에 물난리로 죽은 사람들과 동물들이 참혹하게 쓰러져 있고, 까마귀는 한쪽 구석에서 시체를 쪼아 먹는다. 나무는 뿌리째 뽑히고 가재도구가 어지럽게 널려 있는 세상의 종말 모습이다.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연상시키는 가공할 홍수가 요 며칠 새 서울을 비롯한 중부지방을 덮쳤다. 100년 만의 기록적인 폭우라고 한다. 앞으로도 전국적으로 엄청난 규모의 호우가 예상되면서, 나라 전체가 허둥지둥 불안한 공황 상태에 빠져 있다. 도로와 차가 물에 잠기고 행인들은 무릎까지 차오른 거리를 개울물 건너듯 오간다. 사람이 죽고 지진이 난 듯 땅 곳곳이 갈라졌으며 지하철과 아파트가 침수되었다. 인터넷에 떠도는 '서초동 현자'의 모습은 아우렐리오 루이니 그림 속의 나무통 위에 걸터앉은 남자, 혹은 손바닥만 한 땅 위에 쭈그리고 있는 푸른 옷의 남자와 놀랄 만큼 비슷해 보인다. 당연하게 여기던 평화로운 일상이 이렇듯 산산이 깨지고 부서질 때면, 인간이 자연재해 앞에서 얼마나 무기력한 존재이며 모든 것은 순식간에 파괴될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인간의 역사는 물과의 투쟁의 역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고대의 4대 문명이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나일강, 인더스강, 황하의 범람으로 인한 비옥한 토양을 기반으로 탄생했지만, 동시에 홍수는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고 농사를 망치는 심각한 재앙이기도 했다. 역사학자들은 많은 문화권이 홍수에 대한 신화를 가지고 있는 것은 인류가 실제로 대홍수를 경험했기 때문일 것으로 보고 있다.

홍수 설화는 길가메시 서사시의 설화, 고대 그리스의 데우칼리온 신화, 중세 인도, 마야문명 등 고대의 수많은 문화권에서 나타난다. 그중에서도 구약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 이야기가 가장 유명하다. 인류의 창조 이후 인간들이 나날이 타락하고 사악해지자 신이 홍수를 내려서 멸종시키려 했고, 선택을 받은 자 노아와 그의 가족만이 대홍수를 피해 살아남았다는 설화다. 인간의 원죄설, 종말론, 그리고 최후의 심판 같은 개념은 서구의 기독교 문화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노아의 방주 설화도 이런 정신문화적 배경에서 탄생한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18세기까지도 창세기의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믿었고, 실제 역사적 사건을 묘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화가들도 마찬가지였고, 미술작품에서도 홍수 설화는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노아의 방주 설화가 그렇듯이, 과거에는 홍수나 가뭄 같은 자연재해를 신의 징벌이라고 믿었던 때도 있었고, 부덕한 통치자에 대한 하늘의 응징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지금은 대부분 화석연료의 사용에 의한 지구온난화가 이러한 재해들을 일으킨다고 생각한다. 이제 이산화탄소 배출로 지구가 뜨거워져 기상이변이 속출하고 해수면이 상승하며 북극의 얼음이 녹는다는 주장은 논박할 수 없는 팩트로 굳어졌다. 이에 반대하는 과학자들도 있지만, 어쨌든 인간에 의한 환경파괴가 자연재해의 주범이라는 설이 훨씬 더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사실, 산업혁명 이래 인류는 역사상 그 유례가 없을 정도로 이산화탄소 배출 증가, 지구온난화, 대기오염, 플라스틱과 각종 화학제품으로 인한 생태계 오염 등 수많은 환경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문제들은 우리에게 산업문명에 대한 회의와 '되돌아봄'을 요구하고 있다. 국제환경단체 그린피스 회원들은 사람들에게 환경파괴와 기후변화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터키 아라라트산에서 노아의 방주 모형을 제작했다. 일종의 상징적 퍼포먼스다. 창세기에 의하면, 아라라트산은 대홍수가 끝난 뒤 노아의 방주가 정박했던 곳이라고 한다.

현대 인류는 생태계 파괴의 죄인일까? 우리 문명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일까? 지구는 인간으로 인해 곧 멸망하게 될까? 홍수가 나고 팬데믹이 오고 환경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과학자, 환경운동가 단체, 언론 할 것 없이 한목소리로 우리 문명에 대한 성찰과 반성을 역설한다. 그러나 한번 맛 들인 환경파괴적 생활 패턴의 안락함과 편리함을 우리는 포기할 수 있을까?

김선지 작가·'그림 속 천문학' '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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