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상하이 ②텐쯔팡, 임시정부, 자싱 난후, 김구피난처
골목이란 말을 들으면 인정이 넘친다. 어릴 시절 소꿉놀이가 떠오르고 모퉁이를 돌면 가족이 반갑게 맞아주는 공간이다. 같은 골목이지만 베이징은 후퉁(胡同), 상하이는 룽탕(弄堂)이라 한다. 골목 양쪽으로는 가옥이 다닥다닥 붙게 마련이다. 베이징은 사합원(四合院), 상하이는 석고문(石庫門)이다. 두 도시의 역사와 관련이 깊다.
19세기 말 서구 열강이 상하이에 조계(개항 도시의 외국인 거주지)를 설치하면서 도로를 정비했다. 영국인이 만든 ‘상하이가도명명비망록(上海街道命名備忘錄)’에 따라 남북은 성(省), 동서는 도시를 지명으로 사용했다.
저장베이루(浙江北路)를 지난다. 석고문이 보이고 푸칭팡(福慶坊)이라 적혀 있다. 상하이 인구가 늘어나자 서구 열강은 서민 가옥으로 석고문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도로의 확장과 일맥상통한다. 베이징의 후퉁은 몽골어가 어원이다. 이에 비하면 상하이의 룽탕은 전통이라 하기에 연륜이 짧은 편이다. 처음 석고문과 룽탕이 조성된 시기는 대략 1870년대다.
상하이의 문화거리 텐쯔팡(田子坊)
지하철 9호선 다푸챠오역 근처에 룽탕으로 유명한 텐쯔팡(田子坊)이 있다. 상하이만의 독특한 주소로 타이캉루(泰康路) 210룽(弄)이다. 동서남북으로 입구가 10여 군데에 이른다. 꼬불꼬불한 룽탕마다 공예품, 옷, 식당과 카페, 갤러리가 빼곡하다. 1999년 화가 황융위가 고대 화가의 이름에서 작명했다. ‘전국책(戰國策)’에 기록된 전자방(田子坊)이다. 그의 스승이 바로 공자의 제자이자 상인인 자공이다. 방(坊)도 골목이란 뜻이니 예술가가 모이는 장소로 안성맞춤이었다. 화가와 사진가가 작업실을 열자 문화거리로 변모했다.
룽탕으로 들어서면 석고문이 나타난다. 돌로 테두리를 만든 문이다. 테를 두른다는 고(箍)가 고(庫)로 변했다. ‘돌로 만든 창고’라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19세기 중반 태평천국 민란이 전국을 휩쓸자 저장 일대의 상인과 지주, 관료 등이 상하이로 피신했다. 부동산과 건축 사업자가 빠르게 대규모로 가옥을 짓기 시작했다. 화려한 대저택 대신에 간소하고 편리한 주거환경이 필요했다. 석재와 나무로 문틀과 문짝을 짜고 중국식과 서양식이 혼합된 석고문이 생겨났다. 천년도 견딜 돌로 만든 문이 가게 입구가 됐다. 전통을 그대로 담은 문화 거리다.
예술가의 거리다. 화가의 붓이 벽마다 살아있고 곳곳마다 전시실이며 작업실이다. 우연히 마음에 쏙 드는 전시를 만날 수도 있다. 사진 전시도 많은 편이라 광고판을 자주 만난다. 사진이야말로 효과가 증명된 광고라 발길이 저절로 전시공간으로 움직인다. 1998년 12월 한 문화기업이 처음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상하이를 대표하는 문화공간으로 자리를 잡았다. 볼거리가 많으니 관광객이 몰려들었다.
살아있는 룽탕과 죽은 룽탕이 있다. 막다른 길은 ‘죽은’ 룽탕이다. 텐쯔팡은 대체로 살아있는데 가끔 막힌 곳도 있다. 두루 살피면 혹시 만날지도 모른다. 구석으로 갈수록 술집이 많다. 넓고 ‘살아있는’ 룽탕에는 고급 식당과 카페가 많은 편이다. 밤이 되면 환락가로 변한다. 외국인도 많아 양주나 칵테일 파는 술집이 성황이다. 술에 취하면 ‘죽은’ 통로로 가다가 출구를 찾지 못하고 헤매게 된다.
텐쯔팡에서 동쪽으로 300m를 걷다가 다시 북쪽 마당루(馬當路)로 접어든다. 신텐디(新天地)가 나온다. 거리는 깔끔하고 고급 식당과 카페, 문화공간이 많아 살기 좋은 동네로 꼽힌다. 100년도 더 지난 석고문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거리다. 가로수가 햇볕을 어느 정도 막아주니 산보하기도 쾌적하다.
이유 없이 '사진 촬영 금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
마당루 306룽 푸칭리(普慶里)에 석고문이 일자로 나란하다. 그중 4호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이다. 1919년 3·1 운동의 염원을 담아 4월 11일 프랑스 조계지에 있는 한 건물에서 상하이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당시 회의장은 쇼핑몰로 변했고 흔적을 찾기 어렵다. 국내외 임시정부를 통합해 9월 11일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선포했다.
초기의 청사는 프랑스 영사관 근처였다. 지금은 지명조차 사라진 진션푸루(金神父路)에 위치했다. 1926년 지금의 마당루 유적지로 옮겼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는 훙커우공원에서 시라카와 일본군 대장 등을 폭사시켰다. 상하이를 비롯해 천지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었고 독립운동의 깃발을 만방에 드높였다. 임시정부는 상하이를 떠났다.
당연히 한국 관광객이 꼭 들러보고 싶은 곳이다. 몇 번 찾아가 둘러봤는데 늘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사진 촬영을 금지하고 있다. 도대체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카메라를 열기라도 하면 어느새 직원이 나타나 눈을 부라리며 저지한다. 아무리 봐도 모를 일이다. 임시정부의 활동을 기록한 사진이나 설명이 전부다. 보물이라 할 물건도 없다. 잘못된 기록이라도 있을까 싶어 읽어봐도 평범한 교과서 수준이다. 이유를 물어보면 그저 ‘규정’이라 지껄일 뿐이다. 출구를 지날 때마다 책임자에게 욕을 한마디 내뱉곤 했다. 도둑에게 뺨 맞은 듯한 기분은 풀어야 하니까.
중국 공산당 창당한 곳, 황제의 유적 자싱 난후
1921년 7월 23일 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가 상하이에서 열렸다. 임시정부에서 걸어서 5분 거리다. 역사에 기록될 만큼 중요한 장소였다. 그런데 대회를 상하이에서 마칠 수 없었다. 마오쩌둥, 둥비우를 비롯해 지역 대표 13명은 서둘러 기차를 타고 100㎞ 떨어진 자싱(嘉興)으로 이동했다. 11년 후 체포 위기에 빠진 임시정부의 김구가 피난생활을 한 장소도 부근이다. 고속 열차로 30분이면 도착한다. 시내에 위치한 난후(南湖)로 간다.
호수 안에 섬이 있다. 배로 10분이면 도착한다. 부두에 내려 길을 따라 들어가면 연우루(煙雨樓)가 있다. 물길이 섬 안쪽으로 슬쩍 들어와 있고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1921년 7월 30일 밤 갑자기 프랑스 조계의 경찰이 수색을 시작했다. 황급히 회의 장소를 이 섬으로 옮겼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이동이 손쉬운 배 위에서 회의가 열렸다. 역사에 기록될 중국공산당이 탄생했다.
8월 3일까지 회의는 계속됐다. 당시 회의를 준비한 책임자가 상하이 대표로 참가한 리다였다. 그의 부인 왕후이우는 장소 선정과 요인의 안전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왕후이우의 증언을 참고해 원형 그대로 재현한 배가 정박해 있다.
‘중공일대기념선(中共一大紀念船)’과 아래에 ‘홍선(紅船)’이라 병기돼 있다. 오성홍기를 펼치고 단체사진을 찍는 사람들로 붐빈다. 중국 건국 후인 1964년 부주석을 역임한 둥비우가 배 위에 올랐다. 감개무량하지 않을 리 없었다. ‘혁명의 고동 소리 배 위로 울려 퍼지니, 공산당 탄생으로 노동자 농민에게 경사였네. 청명절 맞아 다시 찾으니, 안개비 자욱하고 그 옛날 발자취 느껴지네.’
둥비우의 글이 걸린 연우루가 보인다. 초록 빛깔 무성한 나무에 휩싸인 2층 누각이다. 1548년 명나라 가정제 시대 자싱의 관리가 처음 지었다. 시간이 흘러 훼손됐다가 1918년 지금 모습으로 중건했다. 창당 ‘위업’의 현장이니 소중하게 보존했다. 누각 앞 담장에 명필의 냄새를 풍기는 조오기(釣鰲磯)가 새겨져 있다. ‘전설 속의 거북을 낚는 물가’이니 신비하기조차 하다. 1582년 명나라 만력제 시대에 지부(知府)를 부임한 공면이 썼다. 휴양과 만찬을 위해 정자를 짓고 호기롭게 쓴 글이 지금껏 남았다.
‘강남의 명루(名樓)’로 소문이 나자 청나라 건륭제가 8번 찾았다. 6차례의 강남 순례 중 두 번이나 더 찾았다. 시도 20편 이상 지었다. 황제의 시는 비석이 됐으나 문화혁명 시기 훼손됐다. 살아남은 어비(御碑)를 동쪽과 서쪽에 정자를 지어 보존하고 있다. 동쪽 비석으로 가까이 가서 읽어본다. ‘연태의희여우태(煙態依稀如雨態)’의 음률이 가슴에 닿는다. 운무와 비가 골고루 섞인 분위기에 황제의 감상이 아련하다. 서쪽에 ‘백경남호일장통(百頃南湖一杖通)’이라는 감탄이 있다. 서로 달리 지었는데 하나의 시인 듯 느낌이 엇비슷하다. 운무가 스며드니 넓디넓던 호수가 그저 황홀경이라는 흥분이다.
크지 않은 섬이다. 다 둘러보는데 1시간이면 충분하다. 뜻밖에도 관광지 중 최고 등급인 5A다. 중국 공산당을 창당한 곳이고 황제까지 다녀갔으니 그럴 만도 하다. 호숫물이 맑지는 않아도 호반 길은 시원하다. 나뭇가지가 축 늘어져 바람에 흩날린다. 호수는 바다와 내륙 어디든지 여러 갈래로 연결된다. 적이 침공하면 쉽사리 도망칠 수 있는 조건을 갖췄다. 언제든지 출발 준비가 된 배다. 가까운 거리에 있는 김구피난처(金九避難處)도 마찬가지였다.
백범 김구의 피신 도운 중국인 일가족
호수 서쪽 메이완제(梅灣街) 76호를 찾아간다. 걸어가도 충분할 만큼 가까운 거리에 김구피난처가 있다. 백범은 윤봉길 의거 후 미국인 목사의 집에 숨었다가 발각될 위험에 처한다. 기차를 타고 자싱으로 옮겼다. 중국국민당의 도움으로 피난처를 확보했다. 자싱 출신의 국민당 관료인 추푸청과 그의 가족이 생명의 은인이었다. 양아들인 천퉁셩의 집에서 은신했다. 피신과 위장, 주변의 도움을 받았어도 24시간 위태로운 피난이었다.
공동의 적인 일제에 대한 폭탄 의거가 중국인에게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층 전시실은 크지 않고 아담하다. 대한민국 독립운동에 대한 중국국민당과 민간인의 지원이 이어졌다는 내용이 중국어와 한글로 적혀 있다. 피난처와 군자금 제공을 받았다는 내용도 있다.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느낀 감동은 그저 휘발성이었다. 맘놓고 사진을 찍을 수 있으니 훨씬 생생하고 인상이 오래 남는다.
피난처에 걸려 있는 사진에는 김구를 비롯해 이동녕, 엄항섭, 김의한의 가족도 있다. 집주인인 천퉁셩도 김구 옆에 앉아 있다. 이동녕, 엄항섭과 함께 넷이서 찍은 장면이다. 독립이 되면 고마움을 잊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사진을 남겼다. 목숨 걸고 도망자의 피난을 돕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추푸청 일가와 찍은 사진을 보니 울컥하는 마음을 누르기 힘들다. 고난의 세월에 돕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친구가 아닌가.
폭탄테러를 주모했다고 공개한 김구에게 천문학적 현상금이 걸렸다. 수백 명의 밀정이 자싱까지 추격했다. 체포의 그물망이 좁혀 들자 추푸청은 며느리이자 맏아들 추펑장의 부인 주자루이를 동원했다. 김구를 동행해 50㎞ 떨어진 바닷가 근처 하이옌(海鹽)의 별장까지 도피하는 임무를 맡긴다. 주자루이는 출산 직후였고 부부 행세를 위해 하이힐을 신었다. 한여름이었으니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당시의 고충과 감사한 마음이 백범일지에 고스란히 남겼다.
굽 높은 구두를 신고 연방 손수건으로 땀을 씻으며 7, 8월 염천에 고개를 걸어 넘는 광경을 영화로 찍어 만대 후손에게 전할 마음이 간절하였다. 국가가 독립이 된다면 저 부인의 정성과 친절을 내 자손이나 우리 동포가 누구라도 공경하고 우러러 사모하지 않으랴. 활동사진은 찍어 두지 못하나 글로라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고자 이 글을 쓰는 것이다.
백범일지
2층에 김구가 기거하던 침실이 있다. 언제든 비상구를 통해 탈출할 수 있다. 하이옌에서 돌아온 후 광둥 출신 중국인으로 행세했다. 부부로도 위장했다. 난후의 옛 이름은 원앙호다. 추펑장의 주선으로 처녀 뱃사공 주아이바오와 선상에서 원앙처럼 동고동락했다. 밀정의 추격과 감시는 소용이 없었다. 독립운동도 지속하고 밤이면 호수와 운하를 오가며 잠을 잤다. 1936년 난징에서 활동할 때도 주아이바오와 함께 지냈다. 1937년 11월 임시정부를 창사로 옮기게 됐다. 이때 주아이바오를 고향인 자싱으로 돌려보냈다. 백범일지 기록을 다시 펼친다.
내가 난징에서 데리고 있던 주아이바오는 거기를 떠날 때에 제 본향 자싱으로 돌려보내었다. 그 후 종종 후회되는 것은 송별 시에 여비 100원밖에는 더 주지 못했던 일이었다. 근 5년 동안 나를 위해 한갓 광동인으로만 알고 섬겨 왔고, 부부 비슷한 관계도 부지 간에 생겨서 실로 내게 대한 공로가 적지 아니한데, 후기(後期)가 있을 줄 알고 노자 이외에 돈도 넉넉히 돕지 못한 것이 유감천만이다.
백범일지
상하이 임시정부는 항저우와 전장,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을 거쳐 1940년 9월 충칭으로 이동한다. 1919년 4월부터 시작된 독립운동은 해방과 함께 종지부를 찍었다. 귀국하기 전 김구는 중국 인민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담은 성명서를 남겼다.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면 김구 동상과 함께 백범일지를 소개하고 있다. ‘피신과 유랑의 나날’에 기록한 자싱의 두 여인만큼 심금을 울리는 이야기가 있으랴. 한여름에 굽 높은 구두를 신고 피난을 도운 여인, 선상의 뱃사공 부인을 포함한 모든 중국인에 대한 인사였다. 독립된 대한민국을 세우고 후기를 도모하려던 김구에게 해방 공간은 너무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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