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는 무엇을 숨기려 했는가' 전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10월 말까지
‘새봄을 맛는 태화관.’ 봄을 알리는 평범한 풍경 사진 밑에 별다른 설명도 없이 달린 여덟 글자엔 무슨 메시지가 있었던 것일까.
1927년 2월 28일 늦은 오후, 경성의 조선총독부 경무국 도서과의 검열관들은 밤새 전국으로 배달될 신문들을 살펴 보느라 경황이 없었다. 오후 4시 무렵부터 신문사들이 보내온 신문들을 보며 혹여 천황을 욕보이는 기사가 없는지 정신없이 뒤적였을 것이다. 검열관들이 '불온한 기사'를 제때 발견해 삭제를 지시하지 못하면 신문사들이 인쇄를 마무리하고 배송을 시작할 터였다.
지면을 빠르게 훑어내리던 검열관의 시선은 ‘중외일보’ 2면 상단에서 멈췄다. 경성의 요릿집을 촬영한 사진 아래 달린 ‘새봄을 맛는 태화관’이라는 설명. 지금도 환절기마다 계절 변화를 전달하는 풍경 사진이 실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얼핏 보면 평범한 사진이었다.
하지만 검열관들은 가벼이 넘기지 않았다. 계절 보도를 가장한 사진과 설명에 숨겨진 ‘불순한 의도’를 간파해 빨간 펜으로 삭제를 뜻하는 '차압'을 표시했다. 다음 날은 바로 3월 1일. 8년 전 민족대표들이 태화관에 모여서 독립선언식을 열었던 날이다. 중외일보가 태화관 사진을 실으며 독자들에게 전달하려던 메시지는 이런 것이었을 터다. “아시죠, 오늘은 3월 1일입니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세요.” 하지만 일제 검열관들의 꼼꼼한 삭제로 독자들은 검은 얼룩밖에 볼 수 없었다.
이달 5일부터 10월 말까지 서울 종로구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열리는 ‘일제는 무엇을 숨기려 했는가?'에선 일제 신문 검열관들이 삭제를 지시한 '검열본'과 신문사들이 이를 반영한 '삭제본'이 짝을 이뤄서 남아있는 중외일보 16개호, 27개 기사가 국내 처음으로 공개됐다. 태화관 사진이 온전하게 남아있는 검열본을 비롯해 해당 사진이 있었던 자리가 벽돌 형상으로 검게 채워진 삭제본도 확인할 수 있다. 1926년 창간된 중외일보는 당시 3대 신문으로 꼽혔으나 재정 악화 등으로 1931년에 종간됐다.
장신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전시 첫날 열린 강연에서 “검열본과 삭제본이 짝을 이뤄서 함께 남아 있는 경우는 이번에 공개된 중외일보가 유일하다”면서 “검열본 자체는 현존하는 신문사나 박물관 등에 남아있지만 정확하게 짝을 이루는 경우는 없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는 “중외일보의 경우는 도서과가 보관하던 자료가 어떤 경로로 유출됐고 최근에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사들인 것이어서 검열과 수정 과정을 정확히 확인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중외일보 검열본·삭제본은 일제 시대 검열이 실제로 어떻게 진행됐는지 보여주는 실물 증거다. 태화관 사진처럼 삭제가 표시된 검열본이 있는 반면, 검열본에 삭제 표시가 없는데도 삭제본에선 기사가 빠진 경우도 있다. 장 교수는 "당대 검열관들이 전화를 이용해서 신문사들에 실시간으로 지시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삭제 표시가 없는 검열본은 시간이 촉박해 전화로 삭제를 지시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태화관 사진 외 다른 사례에서도 무언의 메시지를 내려는 신문 측과 '불순한 의도'를 잡아내려는 검열관의 대응을 살펴볼 수 있다. 예컨대 한 지면에선 천도교 인사였던 최린이 아일랜드에서 정당 당수를 만난 이야기가 실렸다. 당수는 ‘우리가 자치권을 획득했지만 여기서 멈추지 말고 최종 목적으로 가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조선 독립이란 말이 어디에도 없지만 검열관들은 삭제를 지시했다. 장 교수는 태화관 사진의 의의를 이렇게 설명했다. “어떻게 보면 신문사가 기사를 하나 ‘세게’ 쓰는 것보다 이런 식으로 상기시켜주는 역할을 하려고 했던 겁니다. ‘그날을 기억합시다’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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