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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1위...'헤어질 결심' 각본집 서점가 돌풍,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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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1위...'헤어질 결심' 각본집 서점가 돌풍, 왜?

입력
2022.08.06 11:00
수정
2022.08.06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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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헤어질 결심' 각본집 출간 일주일 만에 11쇄
예약판매 기간에도 종합 베스트셀러 1위
N차 관람객들, 감독판 다시 찾듯 각본집 구매
문어체 대사 '유행어 맛집' 되며 패러디 봇물

영화 '헤어질 결심'. CJ ENM 제공

영화 '헤어질 결심'. CJ ENM 제공


'N차 관람' 열풍을 이끌며 장기 흥행 중인 영화 '헤어질 결심'의 각본집(을유문화사 발행)이 주요 서점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했다. '헤어질 결심 각본'은 예약판매를 시작한 지난달 18일부터 인터넷 서점 예스 24, 알라딘의 주간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른 후 이번 주까지 3주 연속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지난달 28일 정식 출간 후에는 온‧오프라인 판매를 모두 집계하는 교보문고의 주간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도 올랐다. 출판사 을유문화사는 5일 "출간 후 일주일 동안 11쇄를 찍었다"고 밝혔다.

장기 흥행 중이지만 영화 '헤어질 결심'의 누적 관객수는 이날 현재 170만 명 언저리에 있다. 1쇄당 발행부수는 '대외비'이지만 대략 2,000부로 가정한다 해도 관객 80~90명당 1명이 이 책을 인터넷으로 주문했거나, 직접 사러 서점까지 갔다는 뜻이다.

출판사도 이런 돌풍은 예상하지 못했다. '헤어질 결심 각본'을 편집한 최원호 편집자는 "영화 관객수 대비 각본집 독자가 어느 정도 될 거라고 예측치를 전망하긴 했다"면서 "기존에 제일 많이 나간 각본집이 1,000만 영화 '기생충'의 각본이었는데, 영화 '헤어질 결심'은 개봉이 '탑건: 매버릭'과 겹쳐 초기 흥행이 좋진 않았다. 이런 호응은 예상치 못했다"고 말했다. '기생충 각본'(플레인 발행)은 출간 5개월이 지난 2020년 2월 아카데미 시상식 전후로 일주일가량 주요 서점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었다.

잘 만든 영화‧드라마, 출판계도 살려

영화 '아가씨' 한 장면(왼쪽), 각본집. CJ ENM, 교보문고 제공

영화 '아가씨' 한 장면(왼쪽), 각본집. CJ ENM, 교보문고 제공

각본집 열풍을 거슬러 올라가면 2016년 개봉한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가 있다. 당시 이 영화에 열성적 팬덤이 형성되며 영화와 관련된 모든 것을 소비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었고, 일부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각본집을 출간해달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박 감독 사진집을 출간한 적 있는 출판사 그책이 아가씨 각본집을 출간, 현재까지 19쇄를 찍으며 각본집의 역사를 새로 썼다.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이 아닌,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각본집이 그만큼 주목을 받은 것은 '아가씨'가 처음이었다.

대상을 영화에서 드라마, 뮤지컬까지 넓히면 각본집(대본집)은 출판의 한 장르가 됐다. 예스24에 따르면 TV드라마·영화·뮤지컬 등 대본집의 연도별 출간 종수는 10년 전인 2012년 12종에 불과했지만, 지난해 46종으로 크게 늘었고, 올해 1분기에만 21종이 출간되면서 큰 폭으로 상승했다.

종합 베스트셀러 순위를 좌우할 정도로 판매도 쏠쏠하다. 지난 1월 종영한 SBS 드라마 '그 해 우리는' 대본집(김영사 발행)은 두 권으로 나눠 출간됐는데 예약판매 직후 예스24 종합 베스트셀러 1, 2위에 이름을 올렸다. 신민아·이선호 주연의 tvN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 대본집(북로그컴퍼니 발행)도 5주간 베스트셀러 순위권에 올랐고, 2018년 종영한 tvN 드라마 '나의 아저씨' 대본집(세계사 발행)은 팬들 요청으로 4년 만인 올해 3월 제작돼 화제가 됐다.

이런 인기에 힘입어 교보문고와 예스24는 올해 6월 발표한 '2022년 상반기 출판 시장 분석'에서 출판 키워드로 '대본집 출간'을 선정했다.


영화로 다 본 이야기... 누가 왜 사볼까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의 각본집과 스토리보드북. 플레인아카이브 제공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의 각본집과 스토리보드북. 플레인아카이브 제공

단순히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즐기고, 다각적으로 소비하고 싶어 하는 팬들이 대본집을 사본다는 해석이 많다. 영화 마니아들이 감독판, 무삭제판 등 영화의 색다른 버전을 반복 관람하는 것처럼 각본집 대사를 곱씹으며 영화의 여운을 즐긴다는 말이다. 각본집 시장은 100만 명의 관객보다는 10만 명의 열성팬이 좌우한다는 말이 그래서 나온다.

예스24 관계자는 "동일한 대본집을 여러 권 구매하는 독자를 통해서도 팬덤을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예컨대 올 상반기 종합 베스트셀러 100위까지의 도서 중 같은 책을 2권 이상 구매한 비율은 전체 구매자의 3.22% 정도인 데 비해 '시맨틱 에러 대본집'을 2권 이상 구매한 비율은 전체 구매자의 7.9% 정도로 2배 이상 높았다.

한데 왜 굳이 대본집을 보며 영화, 드라마의 여운을 느끼려는 걸까.

김현정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담당자는 "애정하는 영화, 드라마의 '태초의 모습'을 살피기에 대본집은 좋은 소재"라고 말했다. 각본집과 개봉용 영화를 한 장면씩 비교하다 보면 제작과정에서 삭제, 변형된 장면을 유추해볼 수 있다는 말이다. 예컨대 영화 '기생충' 각본에는 영화에 미처 담기지 못한 장면들이 있다. 극중 기택과 충숙의 애정 신, 기정이 동네마트에서 몰래 물건을 훔치는 장면, 민혁과 기우가 술을 마시며 유창한 영어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 등이다. 반대로 각본에는 없지만 영화에만 있는 장면이나 대사도 있다.

대부분의 각본집, 대사집은 지문 외에 스토리보드, 영화 스틸 컷 등이 책 곳곳에 담기며 일종의 기념품처럼 출간된다. 이 때문에 영화 '기생충' 각본집(3만7,000원), 넷플릭스 드라마 'D.P 시즌1' 각본집(3만8,900원) 등 상당수 각본집이 여느 단행본 가격의 2배가 훌쩍 넘지만 마니아들은 기꺼이 지갑을 연다. 여기에 일정 부수만 파는 '한정판', 표지를 바꾼 '리커버' 등을 추가로 출간하며 영화, 드라마 팬들의 소장 욕구를 자극한다.

교보문고는 "영화‧드라마 관련 도서는 콘텐츠 팬덤에 대한 일종의 굿즈"라며 "원작 소설, 원작 만화가 드라마‧영화화되면서 판매량이 상승하는 것이 기존의 전형적인 패턴이었다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후에는 대본집, 포토에세이, 컬러링북까지 다양하게 파생하고 있다"고 밝혔다.

팬들이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애정하는 영화, 드라마 대사를 인용할 때, 정확한 확인을 위해서도 구매한다는 후문이다.

그래도 '헤결' 인기는 이례적...비밀은 '문어체 대사'

영화 '헤어질 결심' 한 장면(왼쪽), 각본집. CJ ENM, 교보문고 제공

영화 '헤어질 결심' 한 장면(왼쪽), 각본집. CJ ENM, 교보문고 제공

이 모든 사정을 감안해도 '헤어질 결심 각본'의 돌풍은 이례적이다. 최원호 편집자는 "영화 관객수 대비 각본집 독자 비율로 따져보면 이번 각본집이 '비정상적'으로 많이 팔리는 건 사실"이라고 말했다. 신간의 인기 덕에 박찬욱 감독, 정서경 작가가 2016년에 함께 낸 각본집 '아가씨', '박쥐'의 판매량도 대폭 늘었다. 예스24는 두 각본집 판매량이 '헤어질 결심 각본' 예약판매 시작(7월 18일) 전후 열흘간 각각 713%, 632% 늘었다고 밝혔다.

출판사는 '거품 뺀 가격'을 인기의 한 배경으로 보고 있다. 대부분의 각본집이 영화, 드라마 관련 사진을 넣어 비싼 가격에 팔리는 데 비해, '헤어질 결심' 각본집은 대사와 지문만 담백하게 담아 판매 가격을 일반 단행본 수준(1만5,000원)으로 낮췄다. 구매를 망설이는 팬들의 진입장벽을 낮췄다는 자평이다.

이 영화의 주요 관객층이 도서 시장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20, 30대 여성이란 점도 인기를 견인했다. 박형욱 예스24 PD는 "CGV 조사에 따르면 '헤어질 결심' 관객 중 20대(30%)와 30대(31.7%) 비중이 높게 나타났는데 좋아하는 콘텐츠 관련 소비에 적극적인 20, 30대 특성이 각본집의 구매로도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실제 예스24에서 이 각본집을 산 연령대도 20대가 43.3%(여성 33.9%, 남성 9.4%), 30대가 30.2%(여성 21.2%, 남성 9%)로 대부분을 차지했다.

무엇보다 이 영화 특유의 '문어체(文語體) 대사'가 각본집 인기의 배경이라는 해석이 많다.

박찬욱 감독, 정서경 작가 쓴 대사의 말 맛은 유려하면서도 독특하기로 정평이 나 있지만, 유독 이번 영화에서 수많은 유행어가 탄생하며 패러디로 이어지고 있다. 영화 속 "내가 그렇게 만만합니까?", "그 친절한 형사의 심장을 가져다 주세요", "나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 같은 대사를 주인공 박해일이 출연한 다른 영화 '한산'의 상황을 빗대 이렇게 패러디하는 식이다. "조선이 그렇게 만만합니까?", "저 왜군의 심장을 가져다 주세요", "왜군은요 완전히 붕괴됐어요".

각 서점에 달린 독자 리뷰에서도 대사를 언급하는 반응이 많다. 영화 속 대사 '마침내'를 닉네임으로 한 독자는 감상평을 영화 대사에 빗대 "한국에서는 영화 한 번 봤다고 각본집 읽기를 멈춥니까.(중략) 이미 본 영화가, 각본집을 사는 일을 방해할 순 없습니다"라고 적었다. '고전문학의 기품이 살아 있는 각본집'이란 닉네임의 독자는 "박찬욱 감독 작품 중에서 가장 문학적이라고 느껴졌던 영화였기에 영화를 보자마자 각본을 사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최원호 편집자는 "한꺼번에 여러 대사가 밈(meme‧온라인에서 이미지, 유행어가 급속하게 확산되는 현상)이 되는 영화는 드물다. 대사 패러디가 많은 작품이니까 각본이 어땠는지를 궁금해하는 관객이 많은 것 같다"며 "배우가 연기하기 전, 대사의 뉘앙스를 글자로 확인하고 싶어하는 팬들도 있다"고 말했다.

이윤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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