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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특권층 뿌리는 조선의 홍길동들...‘능력주의’ 신화 일군 제2신분집단

입력
2022.07.22 04:30
수정
2022.07.22 14:34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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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을 넘어서' 저자
황경문 호주국립대 교수 인터뷰
"지위는 성취 가능하다" 믿음 남겨
근대화는 물론, 산업화 민주화 동력
일제 협력, 개혁 도외시 한계도
"현대 엘리트층, 시대적 혜택 인정해야"

18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 본사 스튜디오에서 '출생을 넘어서' 저자 황경문 호주 국립대 교수가 인터뷰하고 있다. 최주연 기자

18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 본사 스튜디오에서 '출생을 넘어서' 저자 황경문 호주 국립대 교수가 인터뷰하고 있다. 최주연 기자

중인, 향리, 서얼, 무반, 서북인. 조선 왕조 신분제에서 차별받던 ‘제2신분집단’이다. 일제 식민지 시기 극적 신분 상승으로 현대 특권층에 올라선다. 그 과정에서 한국 근대 사회에 ‘신분도 성취할 수 있다’는 집단적 무의식을 새긴다. 출세를 지향하고 공정에 예민한 이 '한국적 근대성'은 산업화와 민주화의 숨은 동력이다.

지난 18일 한국일보에서 만난 재미 역사학자 황경문(55) 호주 국립대 교수가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말한 도발적 주장이다. 우리 민족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민족주의 사관, 일제가 한국을 발전시켰다는 극우적 식민사관에서 한참 벗어난 참신한 시각이다. 최근 책 ‘출생을 넘어서’를 펴낸 황 교수는 “한국이 타고난 신분 정체성을 극복하는 특성을 어떻게 발전시켰는지 살펴보고 싶었다”고 했다.

서얼 신화를 이룬 윤웅렬(가운데)과 그의 장남 윤치호(서 있는 사람) 가족의 사진. 너머북스 제공

서얼 신화를 이룬 윤웅렬(가운데)과 그의 장남 윤치호(서 있는 사람) 가족의 사진. 너머북스 제공

제2신분집단은 양반 아랫자리에서 조선 질서를 보조하는 위치에 머물렀다. 양반들이 천시한 역관ㆍ의관으로 일한 중인, 지방 관청 말단직인 향리, 첩의 자식으로 과거조차 볼 수 없는 서얼, 문반(문신)에 밀린 무반(무신), 황해ㆍ평안ㆍ함경 지역 차별로 중앙 관직을 넘볼 수 없었던 서북인이 여기에 해당한다.

신분의 벽은 통곡의 벽이었다. 민간 설화 춘향전에서 양반과 관기(관청에 딸린 기생)인 월매 사이에서 태어난 춘향도 서얼이다. 춘향에게 주어진 운명은 어머니와 같은 ‘공무 수행’(관기)이었기에, 이몽룡과의 약혼이란 결말은 조선판 판타지다. 오히려 서얼이 느끼는 진한 페이소스를 그려낸 홍길동전이 시대상과 부합한다.

황 교수는 "조선 신분제는 미국 흑인 노예제와 비슷하다. 노예주와 양반 남성이 여성을 성적으로 착취하고, 그 자녀들은 노예나 서얼이 됐다"고 꼬집었다.

부당한 세습 신분제를 혁파한 건 일제였다. 그들이 정의로웠다는 얘기가 아니다. 조선을 효율적으로 지배하고 착취하기 위해선 신분제나 양반 계급은 거추장스러운 장애였을 뿐이다. 일제가 과거제를 없애고 관료제를 개혁해 기술을 갖춘 조선인 채용에 나섰을 때 외국어ㆍ군사ㆍ법률ㆍ세금 문제에 밝은 제2신분집단에게 기회의 문이 열렸다. 이들은 식민지 시기인 1930년대에는 경찰, 군수, 지방 의회를 독점하다시피 하며 출세 가도를 달렸다.

그럴싸한 가설이 아닌, ‘족보’에 쓰인 역사다. 가령 무반인 해평 윤씨 가문 서얼인 윤웅렬은 대한제국 시대 고위직을 역임하고 일제에서 귀족 작위를 받는다. 일본 유학파인 그의 장남 윤치호는 개화 운동을 하다 친일로 전향한다. 윤웅렬의 동생 영렬의 손자는 윤보선 대한민국 4대 대통령이다. 초라한 서얼 출신인 윤웅렬ㆍ윤영렬 형제 가문은 식민지 때 신분이 수직 상승하더니, 해방 후 대통령, 장관, 서울시장, 서울대 총장 등을 배출한 엘리트 계급으로 남는다.

또 있다. 창원 구씨 구연수는 갑오개혁 후 정부에서 관직을 차지한 최초의 향리다. 조선총독부 경찰기구 2인자까지 오른다. 아들 구용서는 한국은행 총재, 대한민국 상공부 장관을 역임한다. 제2신분집단과 그 후손은 이처럼 정치ㆍ경제ㆍ문화 분야를 아우르는 신흥 특권층이 된다. 현진건ㆍ최남선ㆍ주시경ㆍ이광수ㆍ안창호ㆍ조만식ㆍ이동휘ㆍ이승만 등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이들이 제2신분집단 출신이다.

출생을 넘어서

출생을 넘어서

결국 일제와 협력해 신분 상승을 이뤘다는 얘기가 아닌가. 맞는 얘기다. 다만 황 교수는 “노골적 기회주의라고 볼 수 있지만, 친일이라고 단순화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왜 그럴까. 이들을 좌절케 한 신분제는 일본이 아닌 조선 왕조의 작품이다. 조선 왕조의 아웃사이더였던 이들에게 나라에 대한 충성은 중요하지 않았다. 신분 상승만 시켜준다면, '누구에게든' 충성할 준비가 됐었단 얘기다.

황 교수는 이들의 한계도 짚는다. 그는 “제2신분집단은 신분 질서를 개혁하기보다 스스로 양반이라고 생각하며 엘리트주의를 강화했다"고 지적했다. 제2신분집단은 '차별의 희생자이자 가담자'였다.

중요한 것은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이다. 이들은 의도치 않게 ‘타고난 것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믿음을 만들었다. 신분은 세습되는 게 아니라 성취하는 것이라는 발상의 전환, 황 교수가 생각하는 한국 근대성의 핵심이다. 황 교수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신분 상승과 출세 욕구는 산업화에도 기여했다고 본다. 아울러 운명론적 신분을 거부하고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평등, 공정에 대한 의식은 민주화의 동력이 됐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명문대 졸업장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지위의식’은 이런 근대화의 부작용이다.

한국 태생인 황 교수는 어릴 적 미국으로 이주해 하버드대에서 석ㆍ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책은 황 교수가 10년간 연구해 하버드대 아시아센터에서 출간(2004년)한 책을 20여 년 만에 옮긴 것이다. 뒤늦게 번역된 까닭은 ‘일제에 부역한 제2신분집단’을 한국 역사학계가 평가 절하했기 때문이 아닐까.

책의 부제는 ‘한국 사회 특권층의 뿌리를 찾아서’다. 황 교수는 “압도적으로 많은 현대 한국 특권층이 제2신분집단의 후손일 것”이라며 “그들은 자기 노력 때문에 성공했다고 쉽게 얘기하지만 부와 교육의 대물림이라는 시대적 혜택을 누렸다는 걸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정지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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