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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판 헤어질 결심

입력
2022.07.18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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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과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가 지난달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NATO) 정상회의에서 만나 악수하고 있다. 서재훈 기자

윤석열 대통령과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가 지난달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NATO) 정상회의에서 만나 악수하고 있다. 서재훈 기자

존슨의 시대는 마침내 존슨의 사람들이 끝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 얘기다. 그는 유능하지 않았다. 영국 BBC방송은 “국정은 산만했고 아이디어도 없었다”고 총평했다.

존슨은 부도덕했다. 총리의 애인과 총리 수석보좌관이 요란한 권력 암투를 벌일 정도로 주변 관리부터 엉망이었다. 코로나19 봉쇄 기간엔 총리실 직원들과 내로남불 술판을 벌였고, 성추행 전력자를 집권 보수당 요직에 앉혔다. 스캔들이 터질 때마다 역정을 내거나 거짓말을 해 화를 키웠다. 쓴소리를 유난히 싫어했다.

정권이 망할 판이었다. 재무장관과 보건복지장관이 이달 초 10분 간격으로 사표를 냈다. 내각에서 약 50명이 동참했다. 여당 의원들도 총리 퇴진을 압박했다. 존슨은 이틀 만에 항복했다. 새 총리가 선출되는 올가을까지 자리만 지키기로 했다.

보수당은 총선을 2년 앞두고 정권 재창출을 도모할 시간을 벌었다. 유권자들은 일단 화를 식히게 됐고, 영국 사회는 리더십을 회복할 기회를 얻었다. 존슨이 임명한 리시 수낙 전 재무장관과 사지드 자비드 전 보건장관이 ‘배신할 용기’를 낸 것이 결정적이었다. 둘은 영웅일까.

수낙과 자비드는 존슨 정권 창업 공신이자 핵심 실세였다. 수낙은 초대 존슨 내각의 재무담당 부장관으로 출발해 승진했고, 자비드는 초대 재무장관이었다. 공개 사직서에서 둘은 존슨의 등에 칼을 꽂는 동시에 스스로를 변호했다. 수낙은 존슨과 한뜻이 아닐 때도 있었지만 내각이 단합해야 하므로 참았다고 썼다. 자비드는 존슨의 자격 없음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보건장관 업적을 늘어놓았다. 정치란 그렇게 비정한 것이다.

정치적 손익계산서만 보면 수낙과 자비드는 영리한 게임을 했다. 영국식 의원내각제 덕에 의원직을 지켰다. 정의롭다는 이미지도 얻었다. 곧바로 야심을 드러낸 수낙은 차기 총리 경선에 나와 선전 중이다. 자비드는 이번엔 출마를 접었지만 50대 초반이라 다음 기회가 있다. 둘이 존슨 정권 실패의 연대책임자라는 것도, 수낙이 문제의 내로남불 술판에 꼈다가 벌금을 냈다는 것도 흘러가버렸다. 존슨과 헤어질 결심을 하기까지 굳이 비장할 필요가 없었다는 뜻이다.

권력은 종종 썩어서 무너진다. 권력자의 곁에 사람이 모이는 건 먹을 것, 챙길 것이 남아있을 때까지다. 정치적 곳간이 비는 순간 몸만 쏙 빠져나가겠다는 유혹을 느끼는 것이 권력의 생리이고 인간의 본성이다. 있을 때 더 많이 먹고 챙기려면 쓴소리를 꾹 참으면 된다. 쓴소리는 떠날 때 허공에 대고 하면 그만이다.

윤석열 대통령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 이른바 ‘윤핵관’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탈출이 급할 때 의리를 지킬까. 잘못된 질문이다. ‘한국판 수낙과 자비드의 난’이 일어나지 않도록, 윤석열 정부를 그들이 성공시킬 수 있을까. 존슨의 외로운 퇴진은 그 물음으로 이어져야 한다.

요즘 대통령실 돌아가는 것을 보면, 윤핵관이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쓴소리다. 다양한 이야기를 정확하게 듣겠다고 청와대까지 버렸는데, 윤 대통령 주변엔 쓴소리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정부 인사를 똑바로 해야 합니다. 도어스테핑을 할 거면 메시지를 진지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대통령으로서 뭘 하고 싶은 건지 헷갈리게 하면 안 됩니다. 김건희 여사가 공식 기구의 보좌를 받게 해야 합니다." 대통령과 지금 헤어질 결심으로 충언한다면, 언젠가 헤어질 결심을 할 일도 없을 것이다.




최문선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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