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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귀 꽃 필 무렵

입력
2022.07.03 22:0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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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귀나무 ⓒ게티이미지뱅크

자귀나무 ⓒ게티이미지뱅크

장마 즈음이 되자 모감주나무, 자귀나무, 능소화 등 여름 나무 꽃들이 일제히 예쁜 꽃을 터뜨린다. 서울 사람들이야 달력을 보고 계절을 안다지만 시골에 살며 작물을 키우다 보면 달력보다 꽃이 먼저다. 자귀나무는 장마 시기를 정확히 알아맞히기에 옛사람들은 장마나무라 부르기도 했다. 그래서 첫 꽃이 피면 팥을 파종하고, 총채 같은 꽃들이 만개할 때쯤 하지 감자, 마늘, 양파 따위를 수확하기 시작한다.

자귀나무 꽃이 피면 내 작은 농장도 또다시 바빠진다. 이곳 경기 북부에서는 벚꽃이 질 때쯤 호박, 오이, 고구마, 고추를 비롯해 온갖 작물을 심기 시작하는데, 그 후 두 번째 농번기인 셈이다. 오늘은 감자와 마늘을 수확하고 메주콩과 들깨를 심기로 했다. 텃밭이 가까이 있으면 며칠 짬을 내 차곡차곡 해야 할 일이건만 기껏 일주일에 한 번 찾는 곳이라 매번 벼락치기를 피할 수가 없다. 욕심을 줄이면 될 것을 빈 땅이 생기고 이 계절에 뭔가 심을 게 있으면 꼭 이렇게 일을 벌이고 만다. 오늘은 서울 사는 처제 부부가 일손을 돕기로 했다.

작황은 양호하다. 감자는 씨감자 4㎏을 심어 80㎏ 이상 수확했으니 '감자는 20배 장사'라는 공식은 얼추 맞춘 셈이다. 다만 장맛비가 잦은 탓에 감자가 무르지 않을까 걱정은 조금 된다. 마늘도 간마늘을 만들어 냉동해 두면 한 1년 요긴하게 사용할 정도는 거두었다. 고추는 볼펜 길이만 한 고추 열매가 열기 시작하고 토마토도 아기 조막 같은 열매를 매달고 있다. 마침내 수확 철에 들었다는 뜻이다.

메주콩은 별다른 거름 없이(콩과 식물은 오히려 땅에 양분을 내어준다) 마늘 수확한 자리에 골라 심으면 그만이지만, 들깨는 한해 내내 비워둔 공간부터 정리해야 한다. 처제 부부를 부른 이유도 그 때문이다. 내가 다른 일을 할 동안 처제 부부가 무성한 잡초를 제거해주기로 했다.

메주콩 모종 200수를 심고 나자 다시 장맛비가 쏟아진다. 나는 얼른 호미를 챙겨 들고 농막 데크로 피신한다. 하루종일 들깨밭을 정리하던 처제 부부도 부랴부랴 올라와 내 옆에 자리를 잡는다. 평생 서울을 벗어나지 않은 두 사람이건만 이곳에만 오면 마치 평생을 농사꾼으로 살아오기라도 한 듯 바지런하다. 농막에서 내려다보니 그 넓은 잡초밭이 어느새 3분의 2가량 누런 바닥을 드러냈다. 저기에 모종을 심어 들깨를 한 말 정도 수확하면 한 해 우리 가족이 먹을 들기름이 나온다.

남은 잡초들 사이로 루드베키아도 여기저기 만발했다. 그래, 그러고 보니 루드베키아도 장마 꽃이었구나.

"고마워, 덕분에 큰일 하나 덜었네."

"고맙기는요. 서울 사람한테도 휴식이 필요한걸요."

내가 고마움을 표하자 동서의 대답이 그랬다. 농사일이 노동이 아니라 휴식이란다. 그 대답이 마음에 든다. 내게는 고작 운동거리이자 소일거리였건만 휴식이라니. 고려대 송혁기 교수는 어느 칼럼에선가 자연을 '화수분'이라고 표현했는데 그 말이 한참 동안 가슴에 머문 적이 있다. "자연은… 아무리 가져다 써도 시간만 지나면 원래대로 채워진다. 일부가 망가지면 스스로 치유하여 회복되는 것이 또 자연이다." 자연과 있으면 우리도 함께 치유되고 채워지는 것도 그 때문이겠지? 그래서 휴식인 걸까? 장맛비가 거세지며 농막 차양을 후두둑 때리고 달아난다. 빗속에 자귀나무가 휴식이라도 취하듯 잎을 가지런히 접는다.


조영학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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