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었던 원장의 성폭행, 정신병원 입원·고교 자퇴
학원장은 태연히 수년간 어학원·해외캠프 운영
폭행·협박 드문 그루밍…5년 흘러 증거는 진술뿐
경찰 불구속 송치, 수사검사가 직접 소명해 구속
"신체 접촉 없었다"더니 재판서 "연인 관계" 번복
공판검사, 피해자 관점서 부심…대거 증인 검증
1심 징역 8년…法 "신뢰얻고 고립시켜 성 착취"
"연인관계? 어떻게 그런 주장을…"
지난 3월 제주지법 법정 방청석에 앉아 있던 하윤(가명)양의 엄마는 가해자 측 주장을 들은 뒤 오열했다. 딸에게 몹쓸 짓을 한 학원장 이모(40)씨에 대한 첫 재판이었다. 엄마는 외교관을 꿈꾸던 딸의 인생을 송두리째 앗아간 그놈에 대해 분노했고, 딸을 제대로 지켜주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기도 했다.
영어 공부에 두각을 보였던 하윤이는 초등학교 5학년이던 2013년, 제주로 이사 와 이씨가 운영하는 어학원에 처음 발을 들였다. 학원에 재미를 붙였고, 이씨의 지도를 누구보다 잘 따랐다. 중학교 2학년이던 2016년 중순엔 이씨를 따라 한 달간 해외 어학캠프에 참여했다. 그때는 몰랐다. 엄마와 멀리 떨어져 주변에 쉽게 도움을 청할 수 없었던 그곳에서 '이씨의 나쁜 짓'이 시작되리라는 걸.
하윤이는 당시 그게 성폭력인지도 몰랐다고 했다. '무섭다' '그만하라'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하윤이는 그 뒤로 학원에 조금씩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씻는 시간도 이상하게 길어졌다. 엄마는 이씨를 영어경시대회에서 수상한 딸의 조력자로 생각해 신뢰했을 뿐, 딸이 학원에서 겪었던 상처는 상상도 못했다. 그 사이 추행은 강간에 이르렀고, 성적 피해는 일상화됐다.
하윤이의 마음은 결국 산산조각났다. 이듬해 학원에 발길을 끊었지만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PTSD) 징후는 심각했다. 거식증에 우울증, 자해 시도까지. 성적 최상위권이었던 하윤이는 학교를 그만뒀고, 정신병원에 입원까지 해야 했다. 의사 권유로 해바라기센터에 방문했지만, 하윤이는 자신이 왜 아픈지 입을 열지 못했다.
친구가 침묵을 깼다. 하윤이에게 사건의 전말을 들은 친구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를 폭로했고, 이씨가 명예훼손으로 맞서면서 하윤이도 친구를 지키려 나선 것이다. 첫 범행 후 5년이 지난 2021년 5월 하윤이는 입을 뗐다.
'그루밍 성범죄' 판단…불구속 송치에 수사검사 나서 구속
경찰서 송치된 사건 기록을 접한 정수정 당시 제주지검 검사의 머리는 복잡해졌다. 성범죄 구성요건을 충족할 뚜렷한 폭행과 협박이 보이지 않았다. 장기간 진행된 범행인 데다 5년이란 시간의 벽이 생각보다 높았다. 게다가 이씨는 하윤이의 병력을 문제 삼아 무고로 맞섰다.
정 검사는 하윤이 사건을 '그루밍(Grooming) 성범죄'로 판단했다. 피해자와 친밀한 관계를 형성해 신뢰를 쌓은 뒤 심리적 지배를 통해 저지르는 성범죄. '피해자 고르기-신뢰 얻기-욕구 충족시켜 주기-고립시키기-성적 관계-통제 유지하기' 단계가 하윤이의 경우와 일치했다.
하윤이의 진술을 뒷받침할 협박 증거를 찾는 게 급선무였다. 정 검사는 "그루밍 성범죄는 폭행과 협박이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아 입증이 쉽지 않다"고 했다. 하윤이가 진술한 내용을 읽고 또 읽어 행간의 의미를 파악해야 했다.
실마리는 가해자인 이씨의 말에 있었다. 이씨는 하윤이를 추행할 때면 학원 폐쇄회로(CC) TV를 보여주며 "친구들이 알면 어떻게 될까"라고 말하곤 했다. CCTV에 엄마가 먹거리를 사들고 학원에 오는 모습이 찍히자 "부모님이 알면 어떤 마음일까"라며 하윤이를 겁주기도 했다. 협박의 정황이었다.
실타래는 그렇게 풀렸다. 경찰은 이씨를 불구속기소 의견으로 송치했지만, 정 검사는 구속이 필요하다 판단했다. 구속 전 피의자심문에도 직접 출석해 구속 필요성을 소명했다.
정 검사는 "범행 현장인 학원을 계속 운영하고 있어 재범 위험이 있다"는 점을 판사에게 강조했다. 매년 어학캠프 명분으로 출국해 도주 우려가 있다는 점과 피해자 회유 및 보복 우려도 강조했다. 이씨는 "하윤이와 신체 접촉이 없었다"며 혐의를 부인했지만, 법원은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전면부인하던 학원장, 공판서 "연인관계" 뒤집어 난관
지난 3월 첫 공판에서 이씨는 "(하윤이와) 연인 관계였다"며 기존 진술을 뒤집었다. 그러면서 함께 착용했던 팔찌와 하윤이가 보낸 문자메시지를 증거로 내놨다. 검찰 조사 당시 꺼내지 않았던 이씨의 '승부수'였다.
공판을 담당한 권동욱 검사는 당황스러웠지만 이내 조서 수백 쪽을 한 줄씩 되짚으며 '피해자는 왜 이씨에게 저항할 수 없었나'를 파고들었다. 그는 "피해자 심정을 이해하는 게 급선무였다"며 "영어에 매진하던 피해자가 가장 신뢰하는 스승이었고, 범행이 학원과 차량에서만 이뤄졌고, 가해자의 일방적 행위만 있었다는 점에서 이씨 주장은 전혀 신뢰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권 검사는 증인들 입을 통해 하윤이 진술이 얼마나 믿을 수 있는지 보여주기로 했다. 이미 대학생으로 성장해 제주를 떠난 친구 등 7명을 일일이 설득해 법정으로 나오게 했다. 증인들은 "이씨가 유난히 하윤이에게 신체 접촉이 잦았고, 하윤이는 점점 어두워져 갔다"고 증언했다.
다만 하윤이를 법정에 세워야 한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권 검사는 매번 공판 후 하윤양 부모를 만나 격려하며 "마지막으로 한 번만 용기를 내달라"고 설득했다. 다행히 재판부는 피고인이 퇴정한 뒤 비디오 중계장치로 진술하도록 했고, 이씨와 동선이 겹치지 않도록 배려해 줬다. 하윤이는 "선생님(이씨)과 관계가 끊어지면 피해사실을 친구와 가족이 알게 될까 두려웠다"고 털어놨다.
법원 '징역 8년' 선고…검사들 "다시 꿈꾸고 비상하길"
제주지법 형사합의2부(부장 진재경)는 지난 9일 이씨에게 아동청소년의성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징역 8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해자 진술을 믿을 수 있고, 피고인의 혐의를 넉넉히 인정할 수 있다"고 밝혔다.
나아가 "피해자가 영어 학습에 강한 성취욕이 있다는 점을 이용해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부모에게도 신뢰를 얻게 되자 정신적으로 고립시키고 왜곡된 성욕 대상으로 삼아 착취했을 뿐, 이성적으로 좋아해 성적 관계를 맺었다곤 도저히 보기 어렵다"고 질타했다.
양측이 항소해 재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2심과 대법원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 하지만 하윤이는 처벌 희망이 생기면서 다시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다. 사건 이후 기피했던 영어에 다시 매진하는가 하면, 대학에 진학할 정도로 생기를 되찾았다.
정 검사와 권 검사는 "하윤이가 다시 꿈꾸고 비상하길 진심으로 바란다"며 "피해자와 가족이 겪은 고통의 시간과 깊이가 양형에 반영되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전했다. 두 검사는 "암장돼 있는 그루밍 성범죄가 많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결국 처벌된다는 경각심이 필요하다"며 "증거가 금방 사라지는 성범죄 특성상 피해자가 용기 내 진술할 수 있는 환경 조성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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