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를 타며 배운다, '어딘가보다 여기' 사는 법을

<92> 넷플릭스 '서바이빙 서머'

편집자주

극장 대신 집에서 즐길 수 있는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OTT) 작품을 김봉석 문화평론가와 윤이나 작가가 번갈아가며 소개합니다. 매주 토요일 <한국일보>에 연재됩니다.

'서바이빙 서머'는 일찌감치 서핑에 인생을 걸어 삶이 무거운 호주 바닷가 마을의 10대들에게 뉴욕에서 전학 온 서머의 밝음과 무모함을 선물하는 이야기다. IMDb 제공

서른이 되던 해의 생일, 나는 나에게 호주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선물했고 두 달 뒤인 초여름에 호주 퀸즐랜드주의 브리즈번으로 향했다. 남반구인 브리즈번은 막 겨울에 접어들고 있었다. 쌀쌀한 한국 가을 정도의 기온에 매일 맑음이라 겨울이라고 부르기는 무색했지만, 한국에서 하던 일을 접고 낯선 세계로 들어선 무일푼의 구직자에게는 살을 에는 추위로 느껴졌고 찬란한 햇빛은 0을 향해 가는 통장 잔고를 선명하게 비추었다.

나는 처음부터 브리즈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시드니나 멜버른에 비하면 너무 작았고 이렇다 할 특색도 볼거리도 없었다. 사건 사고와 자극이 넘쳐나는 서울로부터 쫓겨났으나 대도시의 소음과 소란에 중독되어 있었던 내게, 브리즈번은 지루한 도시였다. 오직 돈을 벌고자 하는 목적으로 향한 나라였기 때문에 호주에도 브리즈번에도 애정이나 관심이 생기지 않았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 같다. 여행자나 학생의 신분으로 지내는 도시와 노동자로 겪는 도시의 인상이 다른 것은 당연한 일인데, 외국인 노동자로 살아가는 고된 일상이 불러일으키는 감정들까지도 호주와 브리즈번에 부당하게 덧씌워졌다. 하루하루가 피로했던 나는 깊이 고민하지 않고 타자로 살았던 외로움과 이별의 상처마저 도시의 인상과 대충 뒤섞어버리고는, 브리즈번을 지루한 도시, 호주를 다시 오고 싶지 않은 나라로 정해버린 뒤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8년 전의 일이다.

미국 뉴욕에서 살던 서머에게 호주 바닷가 마을로의 이주는 '추락'으로 다가온다. IMDb 제공

"우주에서 가장 지루한 시궁창도 여기보단 재미있을 거야." 넷플릭스 호주의 오리지널 시리즈인 <서바이빙 서머>의 주인공 서머(스카이 캐츠)가 외친다. 8년 전의 나도 브리즈번을 그런 식으로 표현했었지만, 서머라면 서울에서 브리즈번 정도의 변화를 뉴욕에서 호주 바닷가 마을로 쫓겨난 현실과 비교하지 말라고 말할 것 같다. 그건 그렇다. 지구상에서 가장 복잡하고 큰 도시라고 할 수 있는 미국 뉴욕에서 세 자릿수도 안될 것 같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호주 빅토리아주 바닷가의 작은 마을 쇼어헤이븐으로 쫓겨난 십 대 소녀에게 이 이주는 추락이었을테니. 난생 처음 보는 새라든가 아름답게 부서지는 파도 같은 건 안중에도 없이, 서머는 언덕꼭대기에서 허공으로 팔을 뻗어 통신 전파를 받아보려 애를 쓰고 있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제목을 떠올려보자. '서바이빙 서머'. 아마도 이 소녀가 이 마을에서 생존하는 일이 이 드라마가 나아가는 방향이 되지 않을까? 제목과 1화의 내용으로 추측해보자면, 이 반항아의 감화는 진실한 마음으로 서핑을 하는 호주의 십 대 친구들을 통해 이루어질 확률이 높을 듯하다. 이들을 통해 정신없는 뉴욕에서 벌인 크고 작은 비행을 반성하고 '진짜 친구'를 사귀는 법을 배우며 성장하는 소녀의 이야기. 그럴듯하다. 성격이 정반대인 소년을 만나 호감을 느끼고 십 대의 연애를 시작하는 것도 아주 중요한 플롯이 될 게 틀림없다. 그게 드라마니까. 하지만 이 예상은 절반 정도만 맞다. '서바이빙 서머'는 일찌감치 서핑에 인생을 걸어 삶이 무거운 십 대들에게 서머의 밝음과 무모함을 선물하는 이야기다. 찬란한 여름의 반짝임과 함께 끊임없이 바뀌는 변덕스러운 여름 하늘의 그늘까지 드리워주는 드라마다. 서머는 쇼어헤이븐의 친구들을 통해, 잦은 파도가 치는 고된 삶을 견뎌야 하는 어린 서퍼들은 서머를 통해 성장한다. 이 드라마를 보기 전에는 잠시 잊고 있었다. 구원과 성장은 모두 상호작용이라는 것을.

서머는 쇼어헤이븐의 친구들을 통해, 잦은 파도가 치는 고된 삶을 견뎌야 하는 어린 서퍼들은 서머를 통해 성장한다. 구원과 성장은 언제나 상호작용이다. IMDb 제공

1년 전 아리(카이 르윈스)가 사고를 당한 후 평생 함께 서핑해 온 네 친구의 관계가 완전히 달라져 있을 때, 서머가 쇼어헤이븐에 도착한다. 절벽 해안에서 바다로 뛰어들었다가 사고를 당한 아리에게는 누구에게도 알린 적 없는 공황장애가 찾아왔다. 친구들의 병문안 없이 재활을 이어온 아리는 더는 우정을 믿지 않는다. 사고 현장에 함께 있었던 말론(호아오 마리뇨)은 깊은 죄책감을 숨기고 있다. 포피(릴리아나 보리)는 마을 서퍼들의 리더이기도 했던 엄마를 반년 전에 잃었으며 서핑보다는 인스타그램에 관심이 많아 보이는 보디(사바나 라 레인)에게는 복잡한 가정사가 있다. 서로에게 느끼는 서운함, 두려움, 설렘, 질투, 미안함과 같은 감정은 1년이라는 시간 동안 꽁꽁 얼어버렸다.

서머는 사고뭉치이자 반항아인 자신의 기질을 살려서 모두에게 직진한다. 하고 싶은 모든 말을 솔직히 하고 받은대로 되갚아주며 충동적으로 기분에 따라 살면서 어른을 속이는 것 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이 뉴욕의 문제아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그건 바로 머물러있지 않는 것, 일단 움직이는 것, 하고 싶은 일은 해버리는 것이다. 서머가 일으키는 사건 사고에 휩쓸리면서 쇼어헤이븐 친구들의 사이도 달라지기 시작한다. 얼어버린 감정에 균열이 생기고 녹자 다시 파도가 친다. 소녀와 소년은 매일 다른 감정의 파도에서, 어렵고 복잡한 우정과 가족의 문제에서, 모두 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고 노력에 반드시 비례하지 않는 스포츠의 세계에서 자신의 힘으로 균형을 잡아가는 법을 배운다. 마치 서핑을 하는 것처럼.

뉴욕에서 온 문제아 서머는 머물러있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은 해버린다. 서머가 일으키는 사건·사고에 휩쓸리면서, 쇼어헤이븐 친구들의 얼어버린 감정도 서서히 녹기 시작한다. IMDb 제공

'서바이빙 서머'의 가장 좋은 부분은 이 모든 이야기가 펼쳐지는 바다를 그저 배경으로만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쇼어헤이븐의 사람들은 슬플 땐 서핑을 한다. 기쁠 때도 외로울 때도, 벅차오를 때도 상처 입었을 때도 바다로 간다. 이 아름다운 바다는 위로와 치유, 활기의 공간이지만 언제든 인간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두려운 대자연의 일부이기도 하다. 절대로 정복할 수 없는 거대한 움직임에 저항하는 대신 겨우 널빤지 하나로 그 흐름에 몸을 맡길 방법을 찾아낸 생명체가 있다. 그게 바로 인간이다. '서바이빙 서머'는 그 인간과 그들이 만든 세계를 들여다보면서도 이 아름답고 두려운 바다를 성의있게 화면에 담는 일을 잊지 않는다. 가능하다면 '서바이빙 서머'를 더 큰 화면으로 보길 추천하는 이유다.

'서바이빙 서머'를 보고 나면 서핑을 인생에 비유할 수밖에 없다. 많은 스포츠가 그러하듯이 서핑 역시 인생이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는 어쩌지 못하는 인생의 파도를 타야 한다. 이 파도가 일지 않기를 바라야 할까? 아니다. 크고 거친 파도는 위험하지만 파도를 일으키지 못하는 잔잔한 바람으로는 서핑 자체가 불가능하다. 언제 모양을 바꾸어 우리를 덮칠지 모르지만 그래도 파도는 필요하다. 서머가 관계를 흔들고 균열을 냈을 때야 비로소 쇼어헤이븐 친구들의 우정이 모양을 바꾸어갔듯이,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는 세계에 살아야 인간은 나아가고 성장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삶의 파도를 두려워하지 않고 즐길 방법이 분명히 있다고 '서바이빙 서머'는 일러준다. 인간은 두려움을 이겨내는 방법을 찾아내고 즐거움과 환희를 느끼는 방법을 끝내 발명하는 존재라고. 겨우 널빤지 하나를 가지고도 말이다.

'서바이빙 서머'는 우리에게 삶의 파도를 두려워하지 않고 즐길 방법이 분명히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IMDb 제공

브리즈번을 떠나 한국으로 돌아온 뒤 수영을 배웠다. 호주의 어디에서도 마음껏 자유롭지 못했던 게 실은 내 탓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이름부터 서퍼스 파라다이스인 해변에 앉아 서퍼들을 바라봐야만 했던 이유는 수영을 할 줄 몰랐기 때문이고 물에 뛰어들지 않았기 때문이고 배우려고 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 서머처럼 '여기보다 어딘가'만을 꿈꾸느라 서울에도 브리즈번에도 살지 못했다. 그렇지만 서머는 원하는 곳에 살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모험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서머는 여기의 즐거움을 찾고 현재에 살 줄 알았다. 나도 파도를 탔어야 했다. 돌아와서야 그걸 깨달았기 때문에 수영부터 시작했다. 수영을 할 수 있게 되면 나중에는 서핑을 배우고 싶었다.

수영을 할 수 있게 된 후 서너 번 서핑 강습을 받았다. 매번 하루짜리 강습이었던 터라 여전히 초보자다. 올 여름에 바다에 간대도 또 서프보드에 배를 대고 엎드려 양팔로 저어 가는 패들링부터 배워야 할 것이다. 그래도 주워들은 규칙이며 동작 이름이 있어서 '서바이빙 서머'를 보는 동안 되새겨보았다. 가장 자주 떠올린 규칙은 이것이다. 한 파도에 한 사람만 탈 수 있다. 강습 때는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서바이빙 서머'를 보면서 정확한 의미를 알게 됐다. 그건 바로 내 파도를 내가 선택해야 한다는 것, 선택한 파도는 책임지고 타야 한다는 것이다. 좋은 파도든 나쁜 파도든, 결국 혼자 타야 한다. 하지만 드라마 속 서핑 코치는 이렇게 말한다. "서핑은 개인 스포츠지만 팀이 있으면 도움이 되지." 이제는 이 말도 어떤 의미인지 안다. '서바이빙 서머'를 보아서이기도 하고 지난 8년간 '어딘가보다 여기'에 사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방법은 나의 팀, 내가 사랑하는 친구들이 알려주었다. 그들이 있어서 서머가 부럽지 않다. 그리고 매일의 파도를 넘어가면서 어떤 파도에는 내동댕이쳐지면서 배운 진실도 하나 있다. 파도는, 기다리면 다시 온다. 자, 이제 다음 파도를 탈 차례다.

윤이나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