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 국통의 도장이 왜 여기에…산골짜기 절터 미스터리

이전기사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저장이 취소 되었습니다.

통일신라 국통의 도장이 왜 여기에…산골짜기 절터 미스터리

입력
2022.07.02 11:00
수정
2022.07.11 10:49
0 0
배기동
배기동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편집자주

우리 역사를 바꾸고 문화를 새롭게 인식하도록 한 발견들을 유적여행과 시간여행을 통해 다시 한번 음미한다. 고고학 유적과 유물에 담겨진 흥분과 아쉬움 그리고 새로운 깨달음을 함께 즐겨 보자.


<21> 강원도 삼척 흥전리 절터

통일신라시대에 지어진 흥전리 절터의 서원 지역에 남아 있는 석물들. 멀리 두문동 고개마루 앞의 바람개비가 보인다

소나무가 하늘을 이고 멀거니 서 있고, 노랗고 하얀 들꽃들이 바람을 타고 흐느적거리는 폐허의 고대 산사는 웅장하고 화려하게 남아 있는 유명한 절을 볼 때와는 또 다른 깊은 감동을 일으킨다. 시간의 무상함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나무로 지은 건물이 많고 전란이 잦았던 우리나라에는 산악 곳곳에 폐사지들을 볼 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안쓰럽게도 석탑만이 외로이 서 있거나 덩그러니 남은 당간지주가 그곳에 절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의 염원이 새로워지면서 그 자리에 다시 절이 세워지기도 하지만, 기록만 남아 있거나 이름 없이 절터만 남아 있기도 하다.

삼척 흥전리(興田里) 절터. 태백산록 깊은 산속에서 최근 발굴된 일신라 시대 불교사원 유적인데 발견된 유물들이 예사롭지 않다. 놀랍게도 당시 국교인 불교를 상징하는 국가 대표적인 유물들이 깊은 산중에서 발견되었으니, 고고학적인 호기심을 발동시키는 유적이다. 지금은 강원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지만, 출토된 유물의 특별한 가치를 볼 때 국가사적으로 지정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불교문화재연구원에서 보내 준 발굴보고서를 들고 길을 나섰지만 아직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영화 속에서 유적을 탐험하는 기분이 들어 흥분되는 여행길이다.

골짜기 속 떠 있는 절터

충북 제천에서 동쪽으로 국도를 타고 고개를 오르내리다 보면 ‘아리랑의 고향’이라고 적힌 작은 비석을 보게 된다. 도 경계를 넘어선 강원도 정선이다. 우리 민족 혼이 담긴 노래 아리랑, 고난을 이기는 힘이 되는 심원한 정서를 갖게 하는 곳이다. 비석에서 오는 느낌이 채 가시기도 전에 탄광 도시에서 카지노 도시로 변신한 사북을 지나니, 이 무슨 기묘한 마음 수련인가! 태백 두문동고개를 넘기 직전에 자장율사가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정암사가 있고, 고개 넘어서는 내가 찾는 절터가 있으니 바로 이 국도가 동유기(東遊記)의 길인가 보다.

흥전리 절터 위치도. 삼수령(한강, 낙동강, 오십천)의 동편에 해당된다. 산의 7부 능선 부근(오른쪽 사진 타원 표시 부분)에 자리 잡고 있고 골짜기 바닥에는 오십천의 지류가 흐른다. 불교문화재연구원 제공

삼척 방향 국도의 흥전리 네거리에서 발굴보고서에 표시된 위치를 물으니, 멀리 보이는 산을 가리키며 가기 어려울 것이라며 말꼬리를 흐린다. 그래도 발굴한 지 오래되지 않았으니 이정표가 있으리라 기대하고 골짜기를 들어섰는데, 산더미같이 석탄이 쌓인 탄광사무소를 지나 계곡을 따라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길이다. 같은 길을 두 번 허탕치고 돌아 나온 다음, 마지막으로 길의 끝까지 간다는 각오로 산을 오르니 경사가 급해 차가 뒤로 뒤집힐 듯하다. 급경사 비탈면에 있는 포도밭을 지나니 키가 삐죽한 소나무 숲이 보인다. ‘그래, 솔밭이라고 하였어!’ 독백을 하고 오솔길을 오르니 큼직한 돌로 만든 건물 축대가 노란 야생화 위로 삐죽이 나선다. ‘와하! 드디어 찾았네.’

내려다보니 절터는 높고 골짜기는 좁아서 바닥이 보이지도 않고, 건너편 산에는 태백산맥 고개의 터널을 나오면서 보았던 바람개비가 지척인 듯 돌고 있다. 골짜기 속 허공에 떠 있는 것 같은 절터이다. 수직 절벽 위에 세워져 속세와 단절한 세계유산 이디오피아 정교의 수도원에 도착한 느낌이었다.

흥전리 절터

큼직하고도 시커먼 축대석들은 아마도 이곳에서 난 돌인가 보다. 다듬기 어려운 돌이다. 역암이라서 부스러지기 쉽기 때문이다. 절터에 오르니 축대 위의 평탄한 들판에 화강석으로 된 탑부재와 거북비대좌, 석등받침석 등을 모아 두고 탑지처럼 사방을 네모지게 구획을 만들었다. 그 동편에 펼쳐진 넓고 평탄한 지형이 아마도 원래 절이 자리한 곳인가 보다. 절터라면 몇 군데라도 큼직한 기둥초석이 솟아올라 있을 텐데, 넓직한 대지 어느 곳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허리만큼 올라오는 초여름의 들꽃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석재를 모아둔 네모구역의 안과 주위에 많은 수의 기와편이 쌓여 있다. 분명 큰 기와집들이 있었을 터인데, 어떻게 된 일일까? 기둥 초석이 높지 않고 발굴된 유적을 보호하기 위해 흙으로 덮었기 때문이다.

서원 지역 아(亞)자형 건물 유구를 항공에서 찍은 사진. 위쪽 석렬은 온돌유구다. 불교문화재연구원 제공

통일신라시대 선종 초기의 산지가람을 보여 주는 이 절터는 동(東)원과 서(西)원으로 나뉘어진 건물군이 있었다. 현재 석재들이 전시되어 있는 곳이 서원에 해당되는데, 탑과 대웅전이 아(亞)자형 평면으로 있었단다. 이곳은 9세기 중엽 중창기에 확장된 구역으로 알려졌다. 석물 조각의 품새를 보면 아주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고 격조가 있다. 그리고 복원되지는 않았지만 우리나라에서 6점밖에 없는 삼단 기단을 가진 석탑이 있었다. 지대석 위에 안상(코끼리의 두 눈을 형상화)을 조각한 하층 기단이 놓인 석탑 축조양식은 석가탑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본이 나와서 유명한 무구정경(無垢淨經, 티끌 한 점 없이 맑게 빛나는 경) 신앙으로 건립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동원 지역 건물지에서 출토된 대형 항아리와 배연시설 안에서 출토된 청동공양구. 아랫줄은 동원 건물지(장고지) 내부에 항아리를 묻은 구덩이들이 노출된 모습. 불교문화재연구원 제공

동원은 남북으로 길쭉한 대지 위에 여러 건물자리가 남아 있는데, 온돌과 큼직한 항아리 자리들이 있는 장고(藏庫)로 미루어 스님들의 행정과 생활 공간이다. 유적의 발굴 도면을 가지고 풀밭을 이리저리 다니면서 유적 내 건물의 정확한 위치를 찾고 눈대중으로 크기를 가늠하는 것도 고고학 유적 탐방의 맛이리라.

청동도장이 던진 의문, 도대체 어느 스님이시길래?

한 세기 전 저술인 삼척지에 남은 한산사(寒山寺)가 이 절터를 지칭한다고 보기도 하지만 더 이른 시기에 돈각사(頓覺寺)라는 절 이름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절의 이름이 중간에 바뀌었거나 중창 과정에서 다른 이름을 사용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 절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대체로 통일신라 시기, 즉 9세기대의 유물이 많다. 특히 파편이지만 금동투조화염문번(金銅透彫火焰文幡)은 일본 법융사의 것과도 흡사하고 초두 끝에 달리는 금동사자상과 함께 최고 수준의 금속공예기술을 보여 주고 있어 이 절의 높은 격을 엿볼 수 있다.

흥전리 출토 금속유물들. 청동정병, 금동번편, 청동인장 2점, 청동합과 대접. 불교문화재연구원 제공

그런데 출토된 유물 가운데는 도저히 이렇게 깊은 산사에서는 발견되리라 예측하지 못한 유물이 있다. 유적에서 최초로 발견된 '범웅관아지인(梵雄官衙之印)'이라 새겨진 청동도장이다. 이것은 당시 나라의 가장 높은 불교 지도자가 사용하던 것으로, 국가가 부여한 강력한 권한을 상징하는 도장이다. 그리고 깨어진 비석 편에 보이는 ‘국통(國統)’이라는 단어 역시 나라의 대표 격의 스님에게 내리던 칭호이다. 같은 비석 파편에 보이는 스님의 부친이 지냈다는 소판(蘇判)이라는 관직은 신라의 16품계 중에서 3번째로 높은 급수이다. 유명한 자장율사의 아버지도 진골왕족으로서 소판을 지낸 것을 보면 대단히 지위가 높은 승려가 이곳에 기거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이곳은 신라의 중심인 경주에서 상당히 멀기도 하고 심심산중이었을 텐데 신라 불교계를 행정적으로 통솔하던 스님이 계셨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19개 건물터의 가람 규모로 그러한 행정력을 수용할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이 생긴다.

왼쪽은 범웅(梵雄)명 청동도장. 가운데 윗줄은 금동번을 보존처리한 모습이며 아랫줄은 비편에 새겨진 '국통(國統)' 글자(좌측 하단). 오른쪽은 비편에 새겨진 '소판(蘇判)' 글자(우측). 불교문화재연구원 제공

선종 사찰은 왕권 강화를 위한 지역 세력 포용 정책으로 각 지역에 만들어졌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이 절 역시 삼척지역 유력자가 귀족 출신 고승을 위해서 세운 것이다. 그렇지만 지역 세력 포섭을 위해 왜 산지에 선종사찰을 건립한 것인가라는 의문이 남는다. 당시 스님들이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지도자로서 지역사회에 영향을 주었을 것은 틀림없지만 읍치소(마을을 다스리던 곳)에서 거의 100리 떨어진 심산에서 그러한 영향을 기대하기엔 의문이 남는다. 여러 학설들이 있지만 이 특별한 유물의 존재는 앞으로 풀어야 할 흥미로운 수수께끼이다.

산사에 가는 사람들

대장경(大藏經) 글자가 새겨진 비편. 대장경명이 들어 있는 신라시대 비는 이를 포함해 두 점뿐이다. 불교문화재연구원 제공

흔히 스님이 된다는 표현을 ‘산으로 간다’고 한다. 깊은 산지에 선종사찰을 세우는 것은 불법공부에 집중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높은 스님, 즉 큰 선지식(善知識)이 계시다면 오늘날 산중에서 이뤄지는 것처럼 스님이나 지역 명문가의 속가제자가 모여 공부하는 수도원의 역할을 한 것은 아닐까? 석물을 모아 둔 자리에서 둘러보니 산들이 360도 병풍처럼 주위를 둘러싸고 구름이 떠 있는 하늘만 보인다. 삼수령(三水嶺)에서 발원하는 오십천을 따라 태백산 정기가 이곳에 모일 테니 이 자리에서 득도한 사람이 여럿일 것이다. 어쩌면 경봉(鏡峰)선사께서 말씀하신 삼소굴(三笑堀)일 것이다. 하늘 떠다니는 구름을 보고 웃고, 흐르는 물을 보고 웃고, 법을 얻어서 웃는 곳이 여기 아닐까? 그런데 산 너머의 정선 정암사와는 달리 왜 폐허로 남았을까? 경사 급한 풀밭을 내려와 절터 아래 폐가 마루에 걸터앉으니 떠오르는 또 하나의 의문이다.

글·사진=배기동 전 국립중앙박물관장·한양대 명예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저장이 취소 되었습니다.

배기동의 고고학 기행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라이브 이슈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