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충해 걱정 덜고 신선한 채소로
푸드코트, 구내식당 등에서 활용
기후 영향 없이 안정적·효율적으로 농사해
"엄청 눈부시다.
저런 거 보면 영화 '마션'에서 농사짓던 거 생각나."
22일 이케아 광명점을 방문한 30대 A씨는 푸드코트 대기 줄에서 벽면 한쪽을 장식한 스마트팜을 바라보며 말했다. 2015년 영화 '마션'에서 홀로 화성에 떨어져 살아남기 위해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이 행성에서 3년 치 식량을 재배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던 주인공은 낯설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햇빛도 바람도 없이 식물이 자라나는 모습을 이제는 쇼핑몰에서, 회사에서, 지하철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가구 쇼핑몰에서 빛나고 있는 스마트팜
'북유럽 인테리어'로 한국에 첫발을 디딘 이케아 광명점에는 2020년 이케아 매장 세계 최초로 도입한 도심형 농장 '파르마레(FARMARE)'가 있다. 스웨덴어로 '농부'를 뜻하는 파르마레는 물도 흙도 없이 엽채류를 키우는 스마트팜의 이름이다.
스마트팜은 정보통신기술(ICT)이 접목된 농장을 아우르는 말로, 농사에 드는 인력을 줄이고 최적의 조건을 계산해 자동화 시스템으로 농사를 짓는다. 이곳에서 재배하는 식물은 샐러드에 자주 활용되는 '카이피라'. 단맛이 나는 유럽종 상추다. 수확한 채소는 곧장 푸드코트에서 샐러드와 샌드위치에 활용된다. 이케아 파르마레 팀 관계자는 "어제 수확하고 오늘 아침에 씻어서 바로 제공한다"며 신선함을 자랑했다.
이케아는 스마트팜을 통해 ①친환경 무농약 ②신선‧고품질 먹거리 ③탄소 발자국 감소 ④최대 90% 물 절약을 이루어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케아 파르마레에서는 전체 수경재배로 이루어져 있고 외부와 완전히 차단되어 있어 농약을 칠 필요도 없는 것. 또 유통의 중간 단계를 없애 탄소발자국을 줄이고 신선도를 최대로 끌어올린다.
이케아는 사람과 지구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 '지속가능한 먹거리'를 내세우며 스마트팜을 도입했다. 스마트팜으로 수익을 내는 것보다도 ESG 경영의 일환이다. 파르마레 관계자는 "물과 배양액을 자동으로 필요한 양만 맞추기 때문에 물 낭비를 하지 않을 수 있다"며 "물도 순환식으로 사용해 일반 농업 대비 약 90%까지 아낄 수 있다"고 말했다.
스마트팜에서 나온 채소인 줄 모르고 샐러드를 먹었다는 김씨 부부는 유리창 너머로 수경재배 베드(작물을 심은 선반)를 보면서 "이런 거 하나씩 집에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당장 보급되길 바라는 건 아니지만 가계에도 환경에도 도움이 되지 않겠냐는 것. 김씨는 "집에 아이도 있고 하다보니 환경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된다고 하니까 관심이 갔다"면서 "아무래도 비료나 농약을 안 치니까 토양 오염을 막기에 좋은 것 같다"고 했다.
11개월 딸과 함께 이케아를 방문한 통역사 김모(39)씨는 스마트팜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고 했다. 김씨는 "처음 마트에서 스마트팜 딸기를 봤을 때는 거부감이 들기도 했다"면서 "모양이나 크기가 다 균일하고 변색도 없어서 공장에서 찍어나온 것 같아 이상했다"고 했다. 하지만 스마트팜에서 재배된 과일과 채소를 한두 번씩 먹어보면서 '나쁘지 않다'는 인식이 생기고 있다고.
출근길에 만난 스마트팜도 한몫했다. 김씨는 이케아 파르마레를 보며 2호선 충정로역에서 매일같이 보던 '메트로팜(MetroFarm)'을 떠올렸다. 그는 "그 안에서 생명이 자라나고 있으니까 신기하기도 하고 반가웠다"고 말했다. 스마트팜으로 농사지어 샐러드 채소를 납품하는 회사 '팜에이트'가 서울교통공사와 협력해 시작한 메트로팜은 스마트팜과 지하철을 뜻하는 '메트로(Metro)'가 합쳐진 이름이다. 상도역을 시작으로 답십리, 충정로, 을지로3가역 등 총 5곳에서 운영 중이다.
출퇴근길 지하철 역사서 만난 녹색 채소들
231㎡(70평)짜리 방에서는 보라색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다. 안을 들여다보니 층층이 엽채류가 자라고 있다. 옆에는 이제 막 운동을 마치고 나온 듯 운동복 차림의 남성이 자판기에서 샐러드를 뽑아 먹는다. 7호선 상도역 5번 출구를 내려가자마자 보이는 메트로팜 상도점 안쪽에는 스마트팜이, 그 옆에는 스마트팜에서 수확한 채소를 활용한 카페가 손님을 맞고 있다.
메트로팜은 지하철 역사에 비어 있는 공간을 활용하기 위해 4년 전 생겨났다. 팜에이트 윤상철 연구원은 "지하에서도 재배할 수 있다는 게 가장 좋은 것"이라며 보랏빛 생육 LED가 햇빛을, 물이 흙을, 서큘레이터(공기 순환기)가 바람을 대신하기 때문에 지하에 위치할 수 있었다고 했다.
윤 연구원은 "낮에는 어르신들이 오후엔 직장인들이 많이 찾는다"며 메트로팜이 시민들의 휴식 공간이 되고 있다고 했다. 16일 친구들과 함께 매장을 이용한 정모(72)씨는 "커피 마실 곳을 찾아 들어왔다"면서 "눈에 띄어서 왔는데 신선해 보이고 분위기도 좋은 것 같다"고 말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유행 이후 급증한 서울 지하철 상가 공실률(2020년 상반기 32.7%)에도 메트로팜은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파종부터 양육까지 수확을 제외한 모든 과정이 자동화되어 있어 작물에 이상이 없는지 확인하고 수확하는 인력을 빼고는 사람 손이 거의 필요하지 않은데, 메트로팜 상도점에서만 한 달에 약 670kg의 작물이 생산된다. 파종 이후 수확까지 주기도 비교적 짧다. 윤 연구원은 "노지에서 키우는 상추가 80일 정도 주기로 수확이 되는 반면 스마트팜에서는 37일이 걸린다"고 말했다.
윤 연구원은 "상추는 특히 기온과 강수량에 영향을 많이 받는데 우리나라는 장마와 폭염이 있어 여름에 '금추(금처럼 비싼 상추)'가 된다"며 "하지만 스마트팜에서는 4분의 1 단가로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또 "수직으로 베드를 쌓아 올릴 수 있어 베드를 여섯 개만 위로 쌓아도 야외에서 농사 지을 때와 비교했을 때 단위 면적당 생산량이 60배까지 차이 난다"고 했다.
메트로팜에서도 샐러드에 많이 사용되는 '이자벨라'와 '카이피라' 등 유럽 품종 작물을 재배한다. 쌈 채소를 재배하는 국내 농가에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사계절 내내 효율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다는 점이 일반 농업을 하는 농민들에게는 위협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는 고민에서다. 하지만 윤 연구원은 최근 샐러드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져 유럽 품종 수요가 늘었다며 앞으로 스마트팜에 주어진 과제가 품종을 늘려가는 것이라고 했다.
메트로팜 상도점에서는 시민을 대상으로 체험 프로그램인 '팜아카데미'도 운영한다. 약 60분 동안 스마트팜 교육을 받고 직접 수확해보는 체험이다. 윤 연구원은 "처음엔 편식이 심한 아이들이 조금 더 가까이에서 식물을 만져보고 수확해보는 경험을 통해 채소에 대한 편견을 깨주려고 데려오는 부모들이 많았다"라며 "요즘은 스마트팜에 관심 있는 대학생들이나 어르신들이 체험하러 오시기도 한다"고 했다.
회사 옥상에서 흙 없이 자라는 토마토
서울 강남의 한 회사 옥상에서는 통유리로 된 천장을 통해 햇빛이 들어온다. 그 아래에는 파프리카와 토마토 모종이 '코이어 배지'에 심긴 채 공중에 떠 있다. 국내 1위 농기계 회사 대동 서울 사옥 옥상에 올해 3월 완공된 스마트팜이다.
대동 사옥에서 만난 윤성근 차장은 "이렇게 오피스룩을 입고도 농사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하지 않나"라며 회사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었던 1등 공신은 흙을 대체한 물과 야자나무 껍질이었다고 했다. 엽채류는 수경재배로, 흙이 필요한 과채류는 야자나무 껍질을 햇볕에 말려 잘게 부순 흙을 활용해 병충해 염려를 덜었다. 온실 안에 있는 센서가 온도, 습도, 일조량 등을 감지하고 환풍기와 차양막을 자동으로 움직인다. 대동 스마트파밍팀 연구원들은 여러 변수를 고려해 설정값을 정하면서 스마트팜을 이용해 최적의 농사를 짓는 솔루션을 개발한다.
직원 복지는 덤이다. 스마트파밍팀 오정심 팀장은 "한 달에 한 번 정도 옥상 스마트팜에서 수확한 상추와 파프리카를 직원들에게 나누어주는데 남는 것 하나 없이 싹 가져간다"고 했다. 최근에는 경기 남양주 현대아울렛과 서울 을지로에 있는 SKT타워 등 회사 사옥에 스마트팜을 짓고 직원 식당에서 활용하고 수확물을 직원들에게 나누어주는 사례가 생기고 있다.
대동에서 하는 스마트팜 재배는 수확물을 팔아 이윤을 얻는 것이 아니라 연구를 목적으로 한다. 윤 차장은 "농기계 회사로서 수도권 바깥 지역에서 대규모로 농사 짓는 농가들이 이전보다 효율적으로 농사지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관행적으로 해 오던 것에 의존해 짓던 '관행 농법'을 보완해 농민들이 농사짓는 다양한 조건에 맞춰 최적의 농업 솔루션을 제공하는 것을 고민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40%에 불과한 국토 면적으로 농식품 수출 전 세계 2위를 차지한 네덜란드는 스마트팜 선진국이다. 면적도 인구도 적은 네덜란드에서 해외로 수출되는 농식품은 2020년 한 해 약 130조 원으로 미국에 이어 세계 2위 규모다.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비) 좋은 농업의 비결은 스마트팜의 높은 보급률이다. 농림축산식품부는 2021년 보고서를 통해 '네덜란드 농업의 95%는 과학기술이고 나머지 5%만이 노동력'이라고 평가하면서 네덜란드에서 스마트팜 보급이 빠르게 시행된 2000년과 2017년 사이 온실농장 평균 생산량이 36%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아직 국내 주요 도시의 스마트팜들은 팜 옆에서 수확한 채소를 샐러드나 샌드위치로 바로 소비하는 형태로 이용되고 있다. 이케아나 대동, '농장은 가까이 있어야 한다'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4월 한국에 첫 매장을 연 '오바마버거'의 굿스터프이터리까지 매장이나 사옥 내 스마트팜에서 딴 채소를 팔지는 않는다.
기술도, 상용화도 준비 끝...제도의 뒷받침은 언제쯤
도심 곳곳에서 스마트팜이 등장하고 정부도 스마트팜 육성에 나섰지만, 현장에서는 지원책이 더 정교화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스마트팜 육성을 종합적으로 뒷받침하는 법이 없고 정부 부처와 지방자치단체가 따로따로 정책을 세우고 있기 때문. 지난해 4월 농림축산식품부는 '스마트 농업 육성 및 지원에 관한 법률(안)'을 입법 예고했다.
스마트팜 지원이 여전히 일반 농업을 기준으로 이뤄지고 있어서 단가를 맞추기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윤 차장은 "정부에서 지원금을 책정할 때 일반 온실을 기준으로 주는데 스마트 온실은 부자재나 기술이 투입돼 (설비 비용이) 세 배 정도 차이가 난다"면서 "스마트 농업이 늘고 있는 만큼 지원이나 정책이 좀 더 촘촘하게 마련돼야 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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