벵하민 라바투트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 ‘별이 빛나는 밤에’는 특유의 붓놀림으로 표현된 푸른색 밤하늘이 압권인 작품이다. 이 빛나는 푸른색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1706년 발견된 최초의 현대적 합성 안료 프러시안 블루가 있다. 스위스의 염료 제조업자가 붉은색 염료를 만들려다 칼륨의 오염으로 우연히 만들어낸 프러시안 블루는 청금석을 갈아 만든 천연 안료의 화사한 쪽빛을 완벽하게 재현했다. 등장하자마자 유럽 미술계에 파란을 일으켰던 이 프러시안 블루는, 그러나 ‘시안화물’이라는 치명적 부산물을 만들어낸다.
#1907년 유대인 출신 독일의 화학자인 프리츠 하버는 식물 생장에 필요한 주요 영양소인 질소를 공기 중에서 직접 채취하는 데 성공한다. 이를 통해 화학비료를 대량생산할 수 있게 됐고, 인류는 오랜 기아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하버는 1918년 이 발명으로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그러나 군국주의자였던 하버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염소가스를 비롯한 치명적인 독가스들을 개발하는 데 힘썼다. 이 중 하나가 시안화물을 이용한 살충 훈증제 ‘치클론’이었다. 치클론B는 훗날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데 쓰이는데, 이때 죽은 유대인 중에는 하버의 이복 여동생과 매부, 조카도 있었다.
아름다운 회화 작품에 쓰인 안료가 치명적인 독극물과 연관되기도 하고, 인류를 기아에서 구해낸 발명과 치명적인 독가스의 발명이 같은 사람에 의해 이뤄지기도 한다. 개별적인 발견으로 남겨두었을 때는 결코 알 수 없던 과학의 ‘빛과 그늘’은 하나의 실에 꿰었을 때 비로소 명상의 대상으로 우리 앞에 다가온다. 벵하민 라바투트의 논픽션소설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는 이러한 ‘실’의 역할을 하는 책이다.
논픽션소설이란 객관적 사실에 소설적 상상력을 덧입힌 작품을 일컫는다.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는 프리츠 하버, 슈뢰딩거, 하이젠베르크, 슈바르츠실트, 그로텐디크 같은 과학자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과학 세계에 지각 변동을 가져온 이들의 위대한 발견은 이야기의 중심 사건이 되고, 이 과정에서 과학자들이 겪는 황홀한 깨달음과 지적 파열의 순간은 소설에 극적인 긴장을 불어넣는다. 지난해 부커상 최종 후보 선정작 중 하나로 부커재단은 “비상한 상상력으로 사실과 허구, 진보와 파괴, 천재와 광기 사이에 놓인 영역을 깊게 파고든다"고 평했다.
총 다섯 개의 단편으로 이뤄진 책은 화학, 물리학, 수학 등 과학의 전 분야를 넘나든다. 중심 소재가 되는 일화 역시 시안화물의 발견부터 블랙홀의 증명, 양자 이론의 수립 등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과학적 사건들이다. 특히 책의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네 번째 글에서는 슈뢰딩거와 드 브로이, 하이젠베르크 등 20세기의 천재 물리학자들이 각자 양자 이론을 수립하고 서로의 주장에 반박하며 양자 역학이라는 ‘역설적인 우주’를 발견해가는 과정이 숨막히게 펼쳐진다.
책은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 허구’임을 전제한다. 치밀한 자료 조사에 기반하고 그 빈틈을 소설적 허구로 메우고 있다곤 하지만, 읽어나가다 보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부터가 허구인지 그 경계가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 작가가 명확히 밝히고 있지는 않다. 다만 후기에서 “뒤로 갈수록 허구의 비중이 커지며, 뒤에서는 더 자유분방하게 쓰되 각 작품에서 다루는 과학 개념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개별 일화의 ‘팩트’ 여부와 상관없이, 책을 다 읽고 난 독자라면 한 가지 명제에는 동의하게 될 것이다. 과학자야말로 철학자이며 위대한 문학가라는 점이다. “고작 흙 입자 하나에 원자 수십억 개가 들어 있다면 대체 어떤 방법을 써야 그토록 작은 것에 대해 유의미하게 이야기할 수 있겠나?”라는 물리학자 닐스 보어의 질문처럼, “시인과 마찬가지로 물리학자 또한 세상의 사실들을 단순히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은유와 정신적 연결을 만들어내야” 했던 존재들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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