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며 아빠가 한 일이 떠오를 때가 있었어요. 성폭력이 무엇인지 알았지만, 그걸 성폭력이라 부를 수 없었어요. 학교에 보내주고, 집에서 재워주고, 밥 먹여주는 사람이 아빤데. 그 사람이 한 일이 범죄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겁났어요."
A씨는 최근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진행한 친족 성폭력 말하기 광장에서 자신의 피해 사례를 털어놨다. 네 살 때부터 성(性)이 무엇인지 알게 될 때까지 성폭력 피해를 입었다는 그는 피해를 당한 지 20년이 흐른 뒤에야 아버지를 고소했다. 어른이 돼 집을 나온 뒤에야 할 수 있던 일이었다.
작년 한 해 동안 가족이나 친척 등 친족을 상대로 성폭력을 저질러 경찰에 붙잡힌 가해자가 700명을 넘은 것으로 조사됐다. 그러나 친족 관계의 특수성으로 인해 A씨처럼 피해 발생 이후 수십 년이 지나서야 사법 절차를 밟는 피해자들이 다수인 점을 고려하면, 이보다 훨씬 더 많은 피해가 매년 일어나고 있을 것으로 추산된다. 시민단체들은 피해자를 더욱 적극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친족 대상 성폭력 범죄의 공소시효를 전면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난해 737명 친족 성폭력으로 검거... 실제는 더 많아
6일 서정숙 국민의힘 의원실이 경찰청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737명이 친족 성폭력으로 검거됐는데, 이 중 피해자와 동거하는 가해자는 473명(64.2%)이었다. 최근 5년간 매년 700~800명씩 검거돼온 점을 비교하면 매년 비슷한 수준으로 신고와 수사가 이뤄진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실제 피해 규모는 이보다 클 것으로 예상된다. 집이나 가족 공동체에서 머무는 시간이 많고, 가족 의존도가 큰 아동·청소년 시절에 피해가 많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여성가족부가 2020년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로 유죄 판결이 확정된 사건들을 분석한 결과,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자의 11.8%가 친족을 대상으로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나타났다.
성인이 돼 신고하려 해도, 공소시효가 지나 처벌이 쉽지 않은 점도 문제다. 현재 친족 성폭력 공소시효는 최대 10년으로, DNA 등 과학적 증거가 있으면 10년까지 연장된다. 다만 범죄의 특성을 고려해 미성년자는 성년이 된 날부터 공소시효가 적용되고, 피해자가 13세 미만이거나 장애인이면 공소시효가 적용되지 않는다. 이는 수차례 법 개정을 통해 일궈낸 결과물이지만, 지난해 한국성폭력상담소에 접수된 친족 성폭력 관련 상담(76건) 중 절반 이상인 57.9%가 공소시효가 끝난 상담이었다. 즉 사각지대가 여전한 것이다.
"공소시효 폐지 필요... 국가가 피해자 적극 도와야"
이에 친족 성폭력에 대한 공소시효 전면 폐지 목소리가 커지고 있지만, 변화는 더딘 상태다. 모든 친족 성폭력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 배제를 골자로 하는 법안은 무소속 양정숙 의원이 2021년 1월 대표발의한 바 있는데, 여전히 국회에 계류 중이다.
여가부도 공소시효와 관련한 개선이 필요하다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공소시효 문제는 법무부 소관이다. 여가부 관계자는 "친족 관계 특수성으로 인해 신고와 처벌이 어려운 문제가 있어서, 피해자 입장을 충분히 반영한 공소시효 관련 법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본다"면서도 "(하지만) 법을 만드는 것은 법무부 소관이라 (관련) 법 개정안을 낼 수 없고, 의견 조회가 들어오면 의견을 내는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시민단체들은 친족 성폭력 피해자들이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떠나 평생을 생활해야 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이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는 "친족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생애 전반적 차원의 통합 지원이 필요하다"면서 "가족의 지원 없이 삶을 이어나가야 할 피해자들의 자립을 지원하는 방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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