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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칭의 존재를 우리 곁으로...'이웃' 김훈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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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칭의 존재를 우리 곁으로...'이웃' 김훈의 기록

입력
2022.06.02 17:00
수정
2022.06.02 17:18
17면
0 0

김훈 '저만치 혼자서'

김훈 소설가. 문학동네 제공

김훈 소설가. 문학동네 제공

김훈은 늘 현장에 있었다. 팽목항에, 라이더유니온 총회에, 중대재해처벌법 촉구 기자회견에 나타났다. “나는 말하기보다는 듣는 자가 되고, 읽는 자가 아니라 들여다보는 자가 되려 한다”(김훈 ‘연필로 쓰기’)는 다짐처럼, 참사와 재해의 현장에 나타나 사람들의 ‘구체적인 고통’에 대해 들었다. ‘구체적인 고통’을 듣는 것은 그들을 ‘무인칭의 존재’가 아닌 ‘우리 곁의 이웃’으로 불러 앉히기 위함이고, 그들의 이름을 알기 위함이다.

김훈의 신작 소설집 ‘저만치 혼자서’에 실린 7편의 단편은 무수한 무인칭의 존재들의 이름을 부르는 데서 시작한다. 2006년 첫 소설집인 ‘강산무진’ 이후 16년 만에 나온 작가의 두 번째 소설집이다. ‘칼의 노래’나 ‘현의 노래’, ‘남한산성’처럼 거대한 역사적 맥락 안에서 이야기의 물줄기를 대던 장편소설과 달리, 우리네 이웃들의 희로애락과 생로병사를 소묘한다. 작가 스스로도 ‘군말’이라 이름 붙인 후기에서 “나는 한 사람의 이웃으로 이 글을 썼다”고 밝히고 있다.

단편 '저녁 내기 장기'는 작가가 호수공원 장기판을 기웃거리며 보고 듣고 겪은 것들에 이야기를 입힌 글이다. 두 노인 오개남씨와 이춘갑씨는 호수공원에서 함께 내기 장기를 둔다. 오개남씨는 신도시 공원 옆 휴먼타운 오피스텔 쓰레기장의 폐지와 유리병을 손수레에 실어 재생공장에 넘기는 일을 한다. 1·4후퇴 이후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태어난 그에게는 남쪽을 열어젖히라는 뜻의 개남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경남 해안의 여러 소읍과 포구를 옮겨 다니며 자란 이춘갑씨는 해군에서 버린 군화를 모아 재생 처리하는 일을 하던 아버지로부터 가죽 일을 배웠다. 그는 휴먼 타운 오피스텔 일층 상가에 일곱 평짜리 점포를 얻어서 구두 수선 가게를 연다.

이름의 회복이 무엇보다 필요한 존재는 국가폭력으로 짓밟히고 추방된 이들이다. 단편 ‘명태와 고래’에서 이춘개는 향일포 선착장에 묶인 배와 배 사이에서 익사체로 발견된다. 조업 중 조류에 밀려 군사분계선 북쪽 어래진 포구로 넘어가게 된 것이 그의 삶을 뒤바꿨다. 남측과 북측은 “바다에서 보면 마을과 지형이 다 똑같고 달빛이 밝아서 다 뿌예 보였다”는 이춘개의 증언을 제 입맛대로 해석했고, 이춘개는 간첩죄와 보안법 위반, 수산어법 위반으로 13년을 복역한다. 이 소설은 전쟁과 분단, 개발독재와 군부독재, 유신과 쿠데타의 시대를 거치며 벌어진 학살과 고문, 인권침해의 사례를 기록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종합보고서를 바탕으로 쓰여졌다.

'저만치 혼자서'. 김훈 지음. 문학동네 발행. 264쪽. 1만5,000원

'저만치 혼자서'. 김훈 지음. 문학동네 발행. 264쪽. 1만5,000원


‘강산무진’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번 소설집에서도 두드러지는 것은 생로병사의 흐름 앞에서 나약한 인간의 모습이다. 표제작이자 가장 마지막 순서로 실린 ‘저만치 혼자서’는 죽음을 앞두고 호스피스 수녀원에 모여 살게 된 늙은 수녀들과 그들을 임종으로 인도하는 젊은 신부의 나날을 그리는 작품이다. 기지촌과 나환자촌에서 봉사하던 수녀들은 나이 들어 쇠한 육신과 온전치 않은 정신 가운데서 뒤척인다. 삶에서 죽음으로 넘어가는 길목에는 각종 질병들이 발에 채인다. 수녀들에게도 질병과 죽음이라는 미지의 사건은 본능적인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오히려 나약한 인간이기에 죽음과 싸우거나 극복하려 하지 않고 그저 유구한 시간에 몸을 맡길 뿐이다. 수녀들은 혀가 말려 들어가 제대로 말을 할 수 없음에도, 울부짖으며 고해성사를 한다. 그리하여 비로소 “죽음은 치유 불가능한 몸의 유한성을 극복하는 구원의 문”이 된다.

역사적 판단이 끝난 사건에 상상력을 덧대는 장편소설 작업과 달리,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웃들의 삶에 대해 쓰는 일 앞에서 작가는 한없이 겸허해질 수밖에 없다. 작가가 “대상에 바싹 들러붙어서” 취재하며 소설을 쓴 이유다. ‘48GOP’는 전방 군부대를 취재한 후에, ‘영자’는 노량진 9급 학원 동네의 젊은이들을 관찰하면서, ‘손’은 오영환 소방사의 이야기를 전해듣고 쓴 것이다. 책에는 “형용사를 쓰지 않으려” 애쓰고 “감정을 글에 개입시키지 않으려” 애쓴 문장들로 빼곡하다. 그럼에도 작가는 이렇게 덧붙인다. “글은 삶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한다.” ‘저만치 혼자서’는 감당 불가능함을 알고서도 그들 곁에 머무르려 했던 ‘이웃’ 김훈이 남긴 기록이다.

한소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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