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초연 오페라 '시칠리아 섬의 저녁기도'
엘레나 역 맡은 소프라노 서선영
"쉰 목소리도 아름다울 수 있어…진심이라면"
등장부터 죽은 오빠의 복수를 선언하는 한 여성. 이내 정복군 앞에서 두려움 없이 자국민의 저항을 촉구하는 노래는 비장하고 결연하다. 정통 오페라 여주인공 중 이보다 강인한 캐릭터가 또 있을까. 이탈리아 독립을 위해 음악을 썼던 주세페 베르디의 오페라 '시칠리아 섬의 저녁기도' 주역인 엘레나는 그런 점에서 특별하다. 2011년 차이콥스키 콩쿠르 우승 이후 세계 무대에서 활약해 온 소프라노 서선영(38)이 이 역할로 한국 관객을 만난다.
"한마디로 여성 독립군이죠. 우리 역사와 닮은 이탈리아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강한 캐릭터라 매력이 컸어요." 서선영은 지난 25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가진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엘레나의 매력을 이렇게 설명했다. 베르디의 또 다른 오페라 '아이다'의 주인공 아이다가 조국과 사랑 사이에서 갈등한다면 엘레나는 보다 결단력이 있는 인물이라고 했다. (서선영은 올 9월에 프랑스 몽펠리에 극장에서 '아이다' 무대에도 선다.)
국립오페라단이 국내 초연하는 '시칠리아 섬의 저녁기도'는 13세기 후반 프랑스 지배에 대항해 시칠리아 민중이 봉기를 일으키게 된 '시칠리아 만종 사건'을 기반으로, 거대한 역사 속 개인의 비극적 서사를 그린 작품이다.
2019년 유관순 열사의 일대기를 그린 '유관순 오페라 칸타타' 공연 경험도 이번 작품을 택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 그는 "3·1운동 당시 '대한독립 만세'를 목놓아 외치는 음성을 듣고 소름이 돋았다"며 "목소리로 사는 사람으로서 '혁명적 시간'이었다"고 표현했다. 성악의 기본으로 여겨지는 '벨 칸토', 즉 아름답게 노래하는 게 전부가 아니라 진심을 다한 노래면 쉰 목소리도 아름다울 수 있다고 깨달았던 순간이다. 지난해부터 모교인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도 이 부분을 수차례 강조한다.
이번 공연을 준비하는 마음도 마찬가지다. 특히 사형 선고를 받은 후 부르는 4막 아리아는 더 애착이 간다고 했다. "홍석원 지휘자도 '이 대목에서 고음은 비명'이라고 하더군요. 고운 소리가 아니라 상황에 맞는 소리가 중요한 거죠."
이번 작품은 그에게 큰 도전이다. "체급이 다른 역할이라 부담이 컸다"고 솔직히 털어놨다. 소프라노도 레슬링 같은 격투 경기처럼 체급이 나뉘는데, 엘레나 역은 어두운 중저음이 강조되는 유형(드라마틱 소프라노)에 속하는 복합적 인물이라 리릭 소프라노로서 밝고 서정적인 노래를 주로 해온 서선영에게 딱 맞아 떨어지지 않는 탓이다. 그럼에도 나이가 들수록 '체급 조정'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2019년 프랑스 로렌 오페라에서 푸치니의 '나비부인' 초초상 역을 맡으면서부터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젊은 연출가인 파비오 체레사와의 호흡은 더할 나위 없다. 100명이 넘는 출연진을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능력이 '천재적'이라는 평이다. 특히 프랑스(하늘색)와 시칠리아(오렌지색) 사람을 그래픽처럼 색으로 구분해서 관객이 한눈에 서사를 이해할 수 있게 했다. 체레사는 시대적 배경을 넘어 억압받는 자와 억압하는 자의 대립, 보편적 평화를 이야기하는 데 이번 연출 초점을 맞췄다. 서선영은 "무엇보다 음악 자체가 주는 충족감이 크다"며 "교향곡과 같은 거대하고 아름다운 베르디의 음악만 즐겨도 좋다"고 덧붙였다.
공연은 6월 2일부터 5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열린다. 소프라노 김성은이 서선영과 함께 엘레나를 맡았다. 상대 역(아리고)은 테너 강요셉·국윤종, 몽포르테 역은 바리톤 양준모·한명원, 프로치다 역은 베이스 최웅조·김대영이 연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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