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브라질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한국 가야금 경연대회에서 입상한다면 비슷한 느낌일까. 유학파도 아닌 토종 한국 블루스 록 밴드 리치맨과 그루브 나이스(리치맨, 백진희, 아이오)가 지난 6~9일(현지시간) 미국 테네시주 멤피스에서 열린 '제37회 세계블루스대회(International Blues Challenge)'에서 밴드 부문 최종 5팀에 선정됐다. 국내 연주자가 이 대회 결승에 진출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전 세계 173개의 블루스 협회와 손을 잡고 미국 블루스 파운데이션이 여는 이 대회는 자신의 이름과 실력을 알리고자 하는 많은 블루스 연주자들에게 꿈의 무대로 불린다. 블루스의 본고장인 미국에서도 각 지역 협회가 여는 대회에서 뽑혀야만 이 대회에 출전할 수 있다. 2019년에 이어 또다시 한국 대표로 선정된 리치맨은 두 번째 도전에서 쟁쟁한 연주자들을 제치고 톱 5의 영예를 안았다.
대회를 마친 뒤 미국 시카고에서 머물고 있는 기타리스트 리치맨(30·본명 차이삭)은 20일 화상 통화에서 “축구로 치면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한 셈”이라며 “준결승만 진출해도 대박이라 생각했는데 준결승 진출 소식을 듣고 너무 좋아서 울었다. 결승 진출했을 땐 믿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는 대회 참가 후 시카고의 3대 블루스 클럽 가운데 하나인 ‘버디 가이스 레전드’의 잼 공연에 초청돼 즉흥 기타 연주를 선보였다.
리치맨은 3년 전 리치맨 트리오의 리더로 참가했으나 예선 탈락했다. 당시 넘지 못할 것만 같은 큰 장벽을 느껴 이번엔 만반의 준비를 했단다. 베이스 기타 연주자가 바뀌면서 밴드 이름도 리치맨과 그루브 나이스로 바꿨다. “그때는 연주력을 보여준다거나 ‘아리랑’을 블루스로 연주하는 등 우리 공연을 보여주려 했어요. 포인트를 잘못 잡은 거죠. 현지에 가 보니 좀 더 춤추기 쉬우면서도 단단한 리듬과 그루브를 들려주는 연주가 많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엔 관객들과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퍼포먼스와 쇼맨십에 초첨을 맞췄습니다. 3년 전엔 연주할 때 아무도 일어서지 않았는데 이번엔 다들 일어서서 즐기는 등 반응이 뜨거웠어요.”
현지 블루스 연주자들도 한국에서 온 신예 블루스 그룹의 연주에 갈채를 보냈다. 미국의 베테랑 블루스 드러머 데니스 코튼은 이들의 공연을 본 뒤 소셜미디어에 “환상적이란 말론 부족하다”면서 “(에릭 클랩튼이나 존 메이올 등) 1960년대 영국 연주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지구 반대편에서 온 그룹이 미국의 예술 형식을 다시 반짝거리게 만들고 더 발전시켰다는 점이 아주 흥미롭다”고 극찬했다.
리치맨은 기타를 배우던 중학생 시절부터 블루스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에릭 클랩튼, 게리 무어, 스티비 레이 본 등을 거쳐 블루스의 시조새 중 한 명인 블라인드 윌리 존슨을 들으며 “기타가 아닌 블루스 음악 자체를 사랑한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그는 “블루스는 그 어떤 장르보다 에너지와 솔(soul·영혼)이 느껴지는 음악”이라고 했다. 2018년 데뷔해 2020년 리치맨 트리오로 첫 미니앨범 ‘EP.1’을 냈다. 리치맨이라는 이름은 “블루스를 연주하는 순간만은 세상을 다 가진 부자가 된 듯한 마음이 든다”는 뜻으로 지었다.
블루스가 국내에선 비인기 장르이다 보니 어려움도 적지 않았다. 블루스를 연주하는 음악인 자체가 매우 드물었고 "블루스는 나이가 들어야 잘할 수 있는 장르”라거나 "블루스는 펜타토닉(5음계) 위주의 쉬운 연주”라는 등 블루스를 무시하는 말도 들었다. “2016년 국내에 블루스 파운데이션의 한국 지부인 한국블루스소사이어티가 생기면서 많은 힘을 얻었어요. 블루스는 가장 ‘올드’한 장르일 수 있지만 또 가장 트렌디한 장르이기도 합니다. 다양한 매력을 지닌 블루스의 진가는 라이브에서 드러납니다. 음반이나 음원보다는 언젠가 꼭 라이브로 한번 접해보셨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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