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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세’와 작별할 때

입력
2022.05.20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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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지난달 서울의 한 주택가에 전기계량기가 설치돼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서울의 한 주택가에 전기계량기가 설치돼 있다. 연합뉴스

우리나라에 ‘전기세’는 실존하지 않는다. 과거 우편함에 꽂히던 요금 청구 용지가 세금 청구서와 비슷할 뿐, 이는 엄연히 세금과 다른 전깃값 청구서다. 한국전력공사가 전기를 독점 판매하는 우리나라에선 국민 전체가 상품 선택권 없이, 매달 지불해야 하는 요금 성격 탓인지 원래 명칭인 ‘전기요금’이나 ‘전기료’보다 전기세란 단어가 국민에게 친숙한 모습이다.

그럼에도 전문가들은 전기세란 단어를 아예 부정할 수만은 없다고 짚는다. 전기요금 결정 체계 최상단에 정부가 있고 한전이 적자를 내면 결국 세금으로 메워주는데, 이게 전기세가 아니면 뭐냐는 얘기다. 전기를 팔아 실적을 내야 하는 건 한전인데 정부는 물가 상승 요인이 있을 때마다 전기요금부터 묶어버리니, 상장사 한전은 주주들보다 정부 눈치를 더 볼 수밖에 없다.

공공재 성격이 강한 전기요금이 온전히 시장경제 논리로만 결정될 순 없지만, 전력업계에선 억제가 과도했을 때 이를 견제할 장치가 없단 점을 가장 큰 문제로 본다. 지난 정부는 재작년 12월부터 연료비 추이에 따라 킬로와트시(㎾h)당 분기 기준 ±3원, 연간 기준 ±5원까지 조정할 수 있도록 한 ‘연료비 연동제’를 도입했지만, 이후 전력 생산비가 기록적으로 뛰었음에도 지난해 2분기와 3분기 그리고 올해 1분기 전기요금 인상에 제동을 걸었다. 1분기 영업손실 7조7,869억 원이란 최악의 실적은 이렇게 탄생했다.

팔면 팔수록 손해가 커지는 비정상적인 전기장사의 대가는 희한하게도 요금 결정 과정에 빠져있던 국민이 치르게 된다. 이달 초까지 한전의 채권발행액은 15조 원, 차입금은 50조 원을 넘긴 것으로 전해졌는데 결국 추후엔 그간의 적자에 이자까지 혈세로 메워야 하는 악순환이 되풀이 될 수밖에 없다. 물론 연료비 인상분 또한 국민이 부담해야 할 몫. 사실상 전기세인 셈이다.

이처럼 억눌린 전기요금에 따른 부작용이 커질 대로 커지자 새 정부도 ‘전기세와의 작별’을 골자로 한 요금 체계 개편을 검토하고 있다. 새 정부 출범에 앞서 한전에서 제시한 다양한 개편 시나리오 가운데 연료비 연동제 가격 조정 폭을 늘리고, 무엇보다 정부가 전기요금 인상을 유보할 수 없도록 전기요금 약관을 개정하는 내용이 반영될지가 관건이다.

고금리와 고물가, 고환율 삼중고에 전기 사용량이 폭증하는 여름을 앞두고 서민과 취약계층 부담까지 생각하면 당장 전기요금을 현실화하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다만, 적어도 세금 성격의 과금 체계를 어느 정도 지우고 ‘원가주의’를 기초로 한 원칙은 세워 놔야 부작용이 최소화할 거란 게 업계 안팎의 분위기다.

정부뿐 아니라 한전 또한 전기세에 기댄 안일함과 작별해야 할 때다. 실적 소식에 ‘역대 최악’, ‘자본잠식 위기’, ‘벼랑 끝’ 같은 수식어가 붙어도 진짜 위기라는 국민적 공감대를 충분히 얻지 못하고, 부동산을 포함한 각종 자산매각 등 고강도 자구책을 발표해도 전기요금 인상 추진을 앞둔 ‘물밑작업’ 정도로 해석되는 이유를 한전 스스로 돌아볼 필요가 있다.

한전 및 자회사들의 도덕적 해이 또한 앞으로 추진될 ‘정당한 요금 수령’에 앞서 짚고 넘어갈 문제다. “저노동 고임금 조직이란 세간 인식은 오해요, 적자 땐 고통분담 없이 지나가되 흑자 땐 두둑한 성과급을 챙긴단 눈초리는 억울하다”고 항변하기에 앞서, 공기업으로서 책무를 다하고 있는지에 대한 점검이 선결 과제란 얘기다.



김형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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