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강의 외 노동도 근로시간 포함" 판결 불구
대부분 대학 어학당서 강의 외 노동 임금 미지급
연세대 한국어학당 강사들, 임단협 결렬에 파업
연세대 한국어학당에서 2016년부터 한국어 강사로 일하고 있는 황모(37)씨는 매일 오전 8시에 출근해 40분간 수업 준비를 한다. 파워포인트(PPT) 등 수업 교재를 점검하고 전날 첨삭한 숙제를 외국인 학생들에게 전송하는 일이다. 오전 8시 40분부터 20분간은 다른 강사들과 교안 회의를 한다.
한국어 수업은 오전 9시부터 오후 1시까지 4시간가량 진행한다. 수업이 끝났다고 업무가 끝난 것은 아니다. 어학 수업의 특성상 매일같이 학생들 숙제를 점검해야 한다. 학생 상담과 생활지원 등도 황씨의 업무다. 한 학기(10주 과정)에 두 차례 있는 중간·기말고사 때는 시험을 출제하고 채점하느라 더 바쁘다.
보통 하루 7시간 넘게 일을 하지만 황씨는 강의를 진행한 4시간에 대해서만 임금을 받고 있다. 연세대가 이른바 '강의 외 노동'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법원, '강의 외 노동' 인정했지만 학교 측 요지부동
13일 민주노총 대학노조와 한국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전국 대학 언어교육원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강사 2,000여 명은 강의 외 노동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강의 외 노동이란 수업 준비, 시험 출제 및 채점, 학생 관리 등 강의가 아닌 필수적 노동을 일컫는 말이다. 강의 외 노동을 일부 인정하는 서울대를 제외하면, 대부분 대학이 관련 임금을 지불하지 않고 있다.
교원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는 한국어 강사들의 처우는 열악하다. 대부분 석사 졸업장과 한국어 교원자격증을 갖고 있는 고스펙 노동자지만 무기계약직으로 호봉에 따라 2, 3만 원대 시급을 받고 있다. 7년 차 강사인 황씨가 월급으로 손에 쥐는 돈은 200여만 원 남짓. 주당 18시간 정도 되는 강의 시간에 대해서만 임금이 나오기 때문이다. 1년에 석 달 정도 학사 일정상 수업이 없는 기간은 급여를 받지 못한다.
이에 대학노조 연세대 한국어학당지부는 지난달 연세대와의 임단협에서 시급 4,000원 인상과 함께 학기당 강의 외 노동 20시간 인정을 요구했다. 통상 강의 외 노동 시간이 강의 시간의 절반에 달하는 만큼 학기당 20시간이면 상당히 적은 수준의 보상 요구라는 게 노조 입장이다. 학교 측은 시급 500원을 올려줄 테니 강의 외 노동에 대한 임금을 요구하지 말라고 답변했다.
노조는 학교 측이 한국어 강사의 강의 외 노동을 인정한 법원 판결을 외면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대법원이 지난해 12월 "한국어 강의에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업무처리에 필요한 시간은 소정근로시간에 포함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결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에 대해 연세대 측은 "강의료는 강의 업무와 이에 수반되는 업무가 이미 포함한 금액"이라고 설명했다.
"수업 외 모든 일이 무급"… 학생들도 "학교 처사 실망"
임단협이 결렬된 뒤 연세대 한국어학당 강사 140여 명 중 130명이 기말고사 출제 및 채점 거부 등 파업에 참여했다.
노조는 이날 마포구 고용노동부 서울서부지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강의 외 노동은 학교 측의 개별 연락을 통한 업무 지시로 이뤄져 왔다"며 "학교는 문서로 기록이 남은 업무 지시마저 부정하며 한국어 강사들이 강의 외 노동을 자발적으로 수행했다는 억지 주장을 펼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지난 3년간 수행했던 교안 회의 등 강의 외 노동에 대한 임금체불 진정을 제기했다.
전날 연세대 본관 앞에서 진행된 노조 기자회견에선 외국인 학생들이 나서 강사들을 옹호하기도 했다. 독일에서 온 뷔리엔씨는 "누구도 이런 불합리한 노동조건으로 살아갈 수 없다"며 "연세대는 도대체 언제까지 우리를 무시할 거냐"고 말했다. 일본 유학생 리코씨는 "교사들의 파업에 대한 연세대 반응이 진심으로 실망스럽다"며 "연세대가 관심을 갖고 합리적으로 해결하라"고 요구했다.
어학당은 강사 파업으로 900여 명에 달하는 학생들의 기말고사 평가를 진행하기 어렵게 되자 4개 과목(말하기 듣기 쓰기 읽기) 가운데 말하기 및 쓰기 주관식은 시험에서 제외했고 나머지 과목은 모두 온라인 시험으로 전환했다. 또 강사들과 채점 완료 여부를 두고 다투고 있는 중간고사 결과는 성적에 반영하지 않기로 했다.
시험 성적은 외국인 학생들의 비자 관련 업무에 영향을 미치는 터라, 학교 측 조치를 두고 학생들 사이에서 불만도 제기되고 있다. 미국에서 온 이정아씨는 "학교 측이 고작 일주일 전에 시험 방식이 변경된다고 알리는 바람에 시험 준비를 할 수 없게 됐다"며 "진학이나 구직을 바라는 학생들은 오직 한 번의 기말시험 점수로 미래가 결정될 판"이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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