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도 잦아지면, 보는 사람의 감각이 무뎌진다. 안타까운데, 딱 거기까지다. 사회가 원망스러운데, 딱 거기까지다. 그 안타까움과 원망스러움을 의미 있는 사회적 논의로 확장시키고자 조금만 힘을 보태달라고 하면 낯설어한다. 낯설다고 눈감았기에 세상은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중략) 처음엔 그래도 조금이나마 미안한 마음에 하고 싶은 말들을 다 뱉지는 않았던 사람들이 당당해진다. 귀찮다고 말한다. 너만 힘드냐고, 유난 떨지 말라면서 빈정거린다. 자기 업보라면서 조롱한다.
오찬호 작가
억울한 사연이 매일처럼 전파를 타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악순환이다. 어떤 사람들은 슬픈 소식들에 지쳐서 마침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포기한다. 어제도 벌어졌고 내일도 벌어질 일인데 특정한 사건에 분개한다고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한 명씩 냉담해지고 내밀었던 손을 거둔다. 때로는 ‘시끄럽게 구는 사람’에게 화살을 돌린다. 일상에 스며든 혐오와 차별을 드러내는 글을 꾸준히 써왔던 오찬호 작가는 최근 출판한 ‘민낯’에서 이러한 세태를 지적하면서 ‘익숙해지지 말자’고 이야기한다. 세상을 만들어가는 주체는 결국 그 구성원들이라고, 우리가 다시 변화의 ‘원인’이 되자고 호소한다.
저자는 한국사회가 기억하겠다고 다짐했던 열두 가지 사건을 불러낸다. 세상을 먼저 떠난 사람들의 생애를 추적하면서 그들의 고통이 ‘어쩔 수 없는 일’ ‘개인적인 일’이 아니었다고 지적한다. 한국사회 구성원들이 함께 책임지고 바꿔나가야 할 일이 남아 있다고 강조한다. 예컨대 변희수 하사의 죽음은 한국사회에 만연한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드러난 사례였다. 변 하사는 자신의 성 정체성에 맞는 성별로 살아가기로 마음먹고 성전환 수술을 진행한다. 변 하사는 사전에 그 사실을 소속 부대에 알렸고 상관도 지지했다. 그러나 육군은 변 하사에게 성기와 고환 훼손에 따른 ‘심신장애 3급’ 판정을 내리고 그를 강제로 전역시킨다.
변 하사는 육군참모총장을 상대로 강제 전역처분 취소 행정소송을 제기해 지난해 10월 승소한다. 저자는 “이유는 간단했다. 원고는 이미 성별 정정을 법적으로 허가받은 여성인데, 왜 여성에게 남성의 성기가 없다면서 심신장애 운운하느냐는 거였다”면서 이 판결이 “군 규정상 결격 사유인 ‘심신 장애’라는 잣대가 사람은 양성으로 구분될 뿐이라는 편협한 시선을 전제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렸다”고 비판한다.
저자는 “변 하사는 기뻐하지 못했다. 2021년 3월 3일, 사망했기 때문이다”라면서 트랜스젠더는 애국도 하지 못하냐고 묻는다. 저자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미국 영국 호주 등 세계 24개국이 트랜스젠더의 군 복무를 허용한다. 저자는 2016년 미국 국방부 장관 애슈턴 카터가 ‘군대 내 트랜스젠더 금지령’을 없앤다는 담화문을 발표하면서 전한 말을 옮긴다. “그것은 옳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능력 있는 사람들을 채용하는 것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를 만드는 길입니다.”
산업재해로 숨진 하청업체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 악성 보도와 댓글에 시달렸던 가수 최진리, 복지 사각지대에 남겨졌던 성북구 네 모녀도 차례로 저서에서 호명된다. 코로나19 팬데믹과 조국 사태, n번방 사건, 세월호 참사, 박근혜 대통령 탄핵 등도 한국사회의 민낯을 드러낸 사건으로 등장한다. 예컨대 코로나19는 공중보건위기가 공동체를 어떻게 갈라놓는지 보여줬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일상이 무너지면 공감 능력도 사라진다. 내가 힘드니, 나를 힘들게 한 이를 원망한다. 사람들은 확진자를 자신의 일상을 어그러뜨린 이로 여긴다. 자신의 일상을 방해한 이를 찾아 비난과 인신공격의 칼을 휘둘러도 된다고 착각한다.”
저자는 악순환을 깨뜨릴 특별한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사회가 개인들의 일상을 어떻게 망가뜨렸는지, 그리고 나머지 구성원들은 그것을 어떻게 방관하거나 방조했는지 보여주면서 ‘익숙해지지 말자’고 호소한다. 사회는 결국 구성원들이 만들어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외환 위기 이후, 각자도생의 법칙이 만병통치약이 된 이유는 사회가 ‘살아남은 자’에게만 주목했기 때문이다. 바늘구멍이 좁아지면 구멍을 넓히는 게 지당하지만, 사람들 사이에는 ‘구멍을 통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만 무성했다. 위기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변화에 얼마나 유연할 수 있는가를 강조하면서 마치 모두가 생존 비법대로 행동하면 살아남을 것처럼 떠들었다. ‘살아남는 법’만 부유하는 사회에서는 ‘살아남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없다. 그래서 공동체의 토대가 푸석해져도 이를 공론화하지 못한다. 지금은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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