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각국에 핵 소지 명분 제공한 꼴
"1994년 우크라 핵 포기가 현 사태 불러"
中·北 등이 핵 고리로 위협 높일 가능성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램프에 30년간 봉인됐던 위험한 핵 지니(요정)들을 풀고 있다.”
9일(현지시간)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러시아가 연일 핵 압박 수위를 끌어올리고 있다고 지적하며 이같이 전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현존 최악의 무기를 꺼내 들 가능성이 큰 것은 물론, 각국에 핵무기를 소지할 명분마저 안기고 있다는 우려다. 우크라이나를 손에 넣으려는 푸틴 대통령의 치명적 오판이 냉전시대 ‘핵 망령’을 다시 깨웠다는 평가다.
WSJ에 따르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핵전쟁 위험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수도 키이우를 ‘속전속결’ 점령하는 데 실패하고 동부지역에서도 가시적 성과를 내지 못하는 등 수렁에 빠진 러시아가 전세 역전과 목표 달성을 위해 소규모 전략 핵무기를 꺼내 들 수 있는 탓이다.
실제 개전 이후 러시아 고위당국자들은 수차례 핵을 거론하며 위협해왔다. 이달 초에도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무장관이 “핵전쟁 위협은 실재하고 과소평가해선 안 된다”며 제3차 세계대전 가능성까지 언급했다. 리처드 베츠 미 컬럼비아대 교수는 “이는 명확한 위협이라기보다 ‘가능성’이라는 유령을 배양하는 효과를 내기 위한 것”이라며 “(러시아 핵 위협은) 지금 푸틴이 처한 상황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단순히 ‘위협’으로 끝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러시아가 던진 핵 공포는 냉전 이후 물 밑에 가라앉았던 국제사회의 핵 담론을 수면 위로 꺼내는 계기가 됐다. 현재 핵무기 개발 직전이거나 핵 개발을 노리는 국가들이 ‘핵무기를 손에 넣는 것이야말로 분쟁을 막을 최선의 방법’이라고 인식하게 됐다는 얘기다.
우크라이나의 과거와 현재의 처지는 이들의 ‘반면교사’다. 소련 해체 직후 1,900기의 핵탄두를 갖춘 세계 3위 핵 보유국이던 우크라이나는 1994년 미국, 영국, 러시아 등과 ‘부다페스트 각서’를 체결했다. 영토의 안전성과 독립적 주권을 보장받는 대신, 핵무기를 포기하는 게 핵심이다. 하지만 28년 후 약속을 깬 러시아의 침공에 우크라이나가 좀체 손을 쓰지 못하면서, "핵을 포기할 경우 언제든 ‘제2의 우크라이나’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국제사회에서 커졌다. WSJ는 “우크라이나가 핵탄두를 여전히 갖고 있었더라면 러시아가 침공을 감행하는 모험을 할 수 있었겠느냐는 반문이 국제사회에서 나온다”며 “서방과 핵 협상을 진행 중인 이란은 물론,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UAE) 역시 이런 생각을 품고 있다”고 전했다.
이미 핵을 소지한 아시아 국가들을 부추길 우려도 한층 높아졌다. WSJ는 양안(兩岸ㆍ중국과 대만) 군사 긴장 상황을 언급하며 “푸틴 대통령이 중국에 핵을 악용하는 방법을 보여줄 수 있다”고 우려했다. 중국이 만에 하나 대만 침공을 선택할 경우 러시아의 행동을 전례 삼아 핵을 고리로 협박에 나설 수 있다는 얘기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한국이나 일본을 위협하는 방법으로 핵 카드를 고수하는 것도, 또 다른 핵 보유국인 인도와 파키스탄 역시 러시아 상황을 주시하는 것도 이런 이유로 풀이된다. 결국 우크라이나 전쟁이 언제, 어떻게 끝나든 세계는 향후 수년간 핵 위험을 안고 살아가게 됐다는 의미다.
러시아는 재래식 무기를 이용한 공격도 멈추지 않고 있다. CNN은 이날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남부 항구도시 오데사에 신형 극초음속 미사일 ‘킨잘’ 3발을 포함, 미사일 7발을 쏴 호텔과 쇼핑몰 등이 파괴됐다고 전했다. ‘최후의 항전’이 벌어지고 있는 동남부 마리우폴의 아조우스탈 제철소에도 포격이 이어졌다. 러시아군이 아조우스탈을 지키는 우크라이나 수비군을 전멸시키려 화학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현지 당국 관계자의 주장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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