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수처 불기소 처분 이유서 보니>
열흘 전 바꾼 하드디스크 또 교체
삭제 정보 복구 방해하는 앱 설치
포렌식 못하게 비밀번호 제공 거부
정책관실 컴퓨터 모두 포맷·초기화
"검사들이 증거인멸 더 철저… 씁쓸"
'고발 사주' 의혹에 연루된 전·현직 검사들의 조직적 증거인멸 정황이 구체적으로 확인됐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는 신참 인력으로 8개월간 총력 수사했지만, 수사에 잔뼈가 굵은 베테랑 검사들의 증거인멸 행태에 혀를 내둘러야 했다.
한국일보가 6일 확인한 35쪽 분량의 '고발 사주' 의혹 불기소 처분 이유서에는 전·현직 검사들의 증거인멸 정황이 상세히 기재됐다. 부장검사 출신의 김웅 국민의힘 의원은 의혹이 첫 보도된 지난해 9월 2일 곧바로 스마트폰을 교체했다. 수사에 대비해 서둘러 교체한 것으로 보인다. 대검 수사정보정책관이었던 손준성 검사(현 대구고검 인권보호관)를 보좌했던 A검사도 보도 당일 발빠르게 움직였다. 불과 열흘 전에 교체했던 PC 하드디스크를 재차 교체했다. A 검사는 닷새 뒤 텔레그램과 카카오톡 메신저 대화내역까지 삭제했다.
공수처는 손 검사 자택 압수수색 등 강제수사에 착수한 9월 10일 손 검사의 휴대폰을 확보했다. 하지만 손 검사가 휴대폰 비밀번호 제공을 거부하자, 공수처는 포렌식(증거 복원과 분석)조차 못 했다. 공수처는 같은 날 김웅 의원의 차량 블랙박스를 확보했지만 압수수색 장소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모두 삭제됐다.
손 검사는 9월 13일 텔레그램을 탈퇴했다. 손 검사는 2020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사법연수원 동기(29기)인 김 의원과 텔레그램을 통해 고발장과 관련 판결문의 사진 파일을 전송했다. 이 파일이 김 의원에서 고발 사주 의혹 제보자인 조성은씨로 전달되며 '손준성 보냄' 문구가 텔레그램에 남게 됐다. 총선 직전 두 차례 전송된 고발장에는 당시 윤석열 검찰총장과 가족, 검찰을 공격하던 범여권 인사들을 명예훼손과 선거법 위반 등 혐의로 고발하는 내용이 담겼다.
전·현직 검사들은 흔적을 안 남기려 휴대폰 증거 삭제에 주력했다. 김 의원은 9월 14일 휴대폰 통화내역을 삭제했다. A검사는 9월 16일 텔레그램과 카카오톡 메신저 대화내역을 재차 삭제하고, 9월 17일 서울중앙지검 조사를 받기 전 수사정보정책관실 선배인 B검사와의 통화내역과 텔레그램 비밀채팅방까지 삭제했다. A검사는 9월 21일 수사기관의 삭제정보 복구를 방해하는 '안티포렌식' 앱까지 설치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B검사도 손준성 검사와 마찬가지로 압수된 휴대폰의 비밀번호를 제공하지 않아 공수처는 포렌식에 실패했다. 김웅 의원은 10월 초 휴대폰을 초기화하고 모든 내용을 삭제했다.
이들은 컴퓨터에 저장된 증거도 철저히 없앴다. 공수처는 11월 15일 대검 수사정보정책관실 컴퓨터 저장장치(HDD와 SDD)를 압수수색했지만, 모두 초기화돼 기록이 삭제돼 있었다. 손준성 검사와 A·B 검사 간 검찰 내부 메신저 대화도 서버에 남아 있지 않았다. 한마디로 유의미한 증거는 모두 증발된 상태였다.
공수처는 강제수사로 별다른 자료를 얻지 못하자, 핵심인 직권남용 혐의를 불기소 처분할 수밖에 없었다. 손 검사가 고발장 등을 김 의원에게 전달한 것을 문제 삼아 선거법 위반과 공무상 비밀누설 혐의 등을 적용했을 뿐이다. 노련한 검사들의 조직적 증거인멸과 수사 비협조, 공수처의 미숙함까지 겹쳐 결국 고발장 작성자는 밝혀지지 않았다. 검찰 출신의 한 변호사는 "전·현직 검사들의 증거인멸 솜씨는 거의 프로급"이라며 "수사를 잘 아는 사람들이 증거인멸도 철두철미한 걸 보니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고 말했다. A 검사 측은 "보도 당일 하드디스크 교체 사실이 없고, 안티포렌식 앱은 가족 등 사생활 보호를 위해 설치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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