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걸그룹에게 요구되는 이미지 있잖아요. 예전에는 그런 이미지에 많이 갇혀 지냈던 것 같아요.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그 틀을 깨고 진짜 제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게 됐죠."
최근 그룹 러블리즈 출신 가수 이수정과 진행한 인터뷰에서 나온 이야기다. "지금은 걸그룹을 향한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는 말로 이야기는 마무리됐지만 그의 솔직한 고백은 인터뷰가 끝난 뒤에도 많은 생각을 남겼다.
K팝 신이 날로 몸집을 불리며 글로벌 음악 시장의 한 축을 이끌 정도의 위용을 뽐내는 시대다. 글로벌 인기의 가속과 함께 K팝 산업 역시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는 중이다. 이제는 K팝이 대한민국의 주요 수출 산업으로 자리잡았다는 평가도 과언이 아니다.
덩달아 K팝 신드롬을 이끄는 주역인 가수들의 입지도 한층 넓어졌다. 글로벌 시장을 무대로 전방위적 활약을 펼치는 아이돌 그룹에게는 'K-문화 사절'이라는 평가까지 따라 붙는다. 단순히 '아이돌 그룹'이라는 타이틀로 한정지어져 온 이들을 향한 대중의 인식도 상당 수준 변화했다.
달라진 인식, 행동하는 걸그룹
이러한 변화에는 오랜 시간 아이돌에게 요구돼 왔던, 대중이 바라는 이미지에서의 탈피도 포함됐다.
걸그룹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이돌의 입지와 젠더 감수성의 변화 속 소녀다운 이미지, 대중의 판타지를 충족시켜 줄 비주얼, 상냥하고 애교 넘치는 태도 등 이들에게 요구됐던 이미지는 이제 구시대적 사고방식의 산물이 됐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해도 암묵적으로 용인돼 왔던 걸그룹의 성상품화 역시 이젠 대중에게 비판을 받는 요소가 됐다. 불필요한 노출이나 성적 대상화에 대한 경계어린 시선이 확대되면서 걸그룹들의 콘셉트 스펙트럼 역시 상당히 넓어졌다.
자신들을 향한 고착화된 인식 변화 속 걸그룹 멤버들 역시 이전과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대중을 만나기 시작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자신들을 향한 무례함에 불쾌한 심경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과거 소녀답고 순수한, 언제나 미소를 잃지 않는 모습을 요구받던 시절에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변화다.
일례로 앞서 여자친구 예린은 자신의 라이브 방송에서 지속적으로 다른 멤버의 근황을 묻는 댓글을 다는 네티즌에게 "왜 자꾸 그런 걸 물어보냐. 내가 별로냐. 그게 궁금하면 나중에 다른 멤버에게 물어보라"는 사이다 발언으로 일침을 가했으며, 러블리즈 이수정과 유지애도 라이브 방송 중 자신에게 "진짜 싫다"는 악플을 다는 네티즌에게 "싫으시면 (방송에서) 나가면 된다"는 시원한 발언으로 응수했다. 위키미키 최유정 역시 악플러에게 "평생 그렇게 살라"는 댓글을 남기며 도를 넘은 이들을 향한 불쾌한 심정을 적극적으로 드러낸 바 있다.
경복고의 '에스파 논란', 아직 갈 길이 멀다
하지만 서울 경복고등학교(이하 경복고)에서 불거진 사건은 아직도 걸그룹에 대한 인식 변화는 아직 갈 길이 멀었음을 느끼게 한다.
이번 논란은 지난 2일 에스파가 경복고 개교기념식 행사에 참여하며 불거졌다. 에스파의 공연이 끝난 뒤 경복고 재학생의 SNS로 추정되는 계정들에 에스파 멤버들에 대한 성희롱성 발언이 담긴 게시물이 게재되면서다.
이후 해당 게시물이 빠르게 확산되며 논란이 불거지자 경복고 측은 1차 사과문을 게재했다. 하지만 해당 사과문에서 경복고 측은 "외부인으로 인해 결코 사실이 아닌 악의적인 글이 게재됐을 것"이라는 입장을 밝히며 책임 회피에 급급한 모습을 보여 더 큰 비난 여론을 불러 일으켰다.
결국 경복고 측은 재차 사과문을 게재하고 재학생의 부적절한 행동 및 SNS 게시물 게재 사실을 인정했다. 이와 함께 전체 학생을 대상으로 한 공연 관람예절과 사이버 예절 및 성인지 감수성 교육을 시행해 재발을 방지하겠다는 입장도 덧붙여졌다.
이는 여전히 걸그룹을 성적 대상으로 소비하는 시선이 산재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다. 많은 부분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K팝의 비약적인 성장 속 이에 발맞추지 못하는 대중의 인식이 실로 안타깝다. 비단 걸그룹 시장만이 아니라 K팝 문화 전반에 걸쳐 보다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아직까지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는 낡은 사고방식을 과감하게 버릴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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