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명 떨친 독재 가문 재집권 눈앞에]
필리핀의 독재 정치와 폭력적 행태를 상징하는 두 가문이 오는 9일 열릴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가 유력한 상황이다. 이들 가문의 대표 선수는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64) 전 상원의원과 사라 두테르테(43) 다바오시 시장. 각각 대통령-부통령 러닝메이트 후보로 출마한 이들은 과반의 압도적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어 이변이 없는 한 집권이 예상된다.
'마르코스'와 '두테르테'라는 이름은 한국인에게 낯설지 않다. 전자는 1965년부터 21년간 7만여 명의 민주화 요구 인사를 투옥시키고 정적까지 암살했던 마르코스 전 대통령이다. 후자는 '마약과의 전쟁'으로 민간인 6,000여 명을 살해한 혐의로 국제형사재판소(ICC) 조사를 받는 로드리고 두테르테 현 대통령이다.
현지에선 마르코스의 아들과 두테르테의 딸인 두 후보를 '독재가문 어벤져스'라고도 부른다. '스트롱맨'인 부친들과 달리, 한편에서 대중적이고 친숙한 영웅 이미지를 구축했다는 의미의 조롱이다. 반대 진영은 두 가문에 대한 비판과 재집권 위험성을 경고하는 데 선거 운동의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그럼에도 현재로선 필리핀의 표심을 두 가문이 장악하고 있다. 그 배경이 뭘까.
가난에 코로나까지…커지는 경제성장 욕망
1960~70년대 필리핀은 한국보다 잘사는 나라로 불렸다. 미국의 민주주의를 적극 수용해 국가체계를 일찍이 구축했고, 풍부한 자원과 노동력을 바탕으로 국민소득을 빠르게 올렸다. 상대적으로 한국이나 동남아시아 주변국은 전후 재건 등의 여파로 어수선했던 이유도 거론된다. 필리핀에서 이때 등장한 인물이 마르코스 전 대통령이다. 그는 집권 초반 국영기업을 압박해 전기 및 수도세 등을 낮추는 '포퓰리즘'을 펼쳤으며, 산업 인프라 구축에도 나섰다. 지방 토호의 지배하에 살던 국민들 입장에선, 새로운 변화와 희망을 볼 수 있었다는 얘기다.
마르코스 전 대통령은 20년 넘는 장기집권 기간 많은 기업과 토호들로부터 한화 12조 원이 넘는 돈을 부정축재했다. 그의 포퓰리즘 정책은 결국 1980년 오일 쇼크 이후 국가재정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다. 그리고 1986년 권좌에서 쫓겨났다. 수백만 명의 시민들이 독재 타도를 외쳤고 '피플 파워'는 승리했다. 수도 마닐라가 '민주화의 성지'로 불린 이유다. 그가 없어진 이후에도 필리핀이 개발도상국을 벗어나지 못한 건 마구잡이 경제정책의 후폭풍 탓도 크다. 필리핀은 태국과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 동남아 국가들이 7~10%의 고속성장을 이룬 20년 동안 국영기업 민영화 실패 등으로 5% 안팎의 성장에 머물렀다.
필리핀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는 또 다른 재앙이었다. 자체 산업생산 구조가 취약한 필리핀은 1억 인구의 10%에 해당하는 1,000만 명이 한국 등 해외에서 취업해 고국에 외화를 보내왔다. 하지만 코로나19로 해외 송출 인력이 귀국했고, 주력산업인 관광마저 붕괴됐다. 이때 마르코스의 아들과 두테르테의 딸이 정치 전면에 나섰다. 과거와 현재의 경제 실정 내용은 걷어내고, 자신들을 선택하면 한때 희망을 줬던 경제성장의 가능성이 살아날 것이라 목소리를 높였다. 시민들은 이들의 말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가려진 눈과 귀… 'SNS 트롤'마저 활개
필리핀은 전통적으로 유력 가문들이 정계 판도를 좌우한다. 이 두 가문은 초기부터 명확한 통치 전략을 택했다. 신흥 정치가문이 된 두테르테 대통령은 집권 초반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유해를 국립묘지에 안장하며 정치적 연대를 제안했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던 마르코스 후보는 마약과의 전쟁을 옹호하며 정권의 든든한 지원군으로 나섰다. 이 과정에서 두테르테 정권을 치열하게 비판하던 ABS-CBN 등 언론사는 폐쇄됐다.
주류 언론에 압박이 먹혀들자 최근 들어 두 가문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공략에 ‘올인’했다. 필리핀은 7,107개의 크고 작은 섬으로 구성된 데다, 연중 무더운 기후로 야외 유세가 효과적이지 않은 나라다. 여기에 전 국민의 70% 이상이 SNS를 상거래 및 소통 수단으로 쓰고 있어 파급력이 매우 크다. 심지어 두테르테 대통령은 이미 2016년 대선에서 SNS 비방전이 주효해 승리한 노하우를 갖고 있다. 최소 1,250만 건의 악의적 비방과 잘못된 여론전이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 바 있다. 이번에도 같은 승리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는 지난달 상·하원 의회가 통과시킨 '가짜뉴스 방지법(가입자 신원 모듈 등록법)' 시행을 거부해 두 가문의 연합 후보들이 활개 칠 공간을 지켜줬다.
반대 진영에 'SNS 트롤'(Troll·인터넷상의 선동 공작 행위)로 불리는 두 가문의 극렬 지지층은 대선판 전면에서 활약하고 있다. 이들은 '반(反)독재 진영'을 자처하는 레니 로브레도 후보에 대한 인신공격성 가짜뉴스를 유포하고, 마르코스 후보에 대한 찬양 콘텐츠로 SNS를 도배하고 있다.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 서구권 SNS 기업들이 올해만 수천 개의 악성 계정을 폐쇄했으나, 젊은 층이 주로 쓰는 틱톡에선 오히려 악성 게시물 수가 늘고 있다. 틱톡에서만 1,233만 명의 구독자를 가진 마르코스 후보는 SNS에서 주로 활동한다. 올해 열린 4차례 합동 TV토론회에 한 번도 나가지 않았고, SNS로 중계되는 '마르코스 지지 콘서트'에 적극 출연 중이다.
필리핀 대선을 두고 조나단 코퍼스 미국 하버드대 부교수는 "독재 시절에 대한 근현대사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한 필리핀의 50대 이하 층이 전체 유권자의 52%를 차지한다"며 "SNS 트롤에 의한 잘못된 정보가 광범위하게 퍼져 젊은 층이 과거 독재를 정확히 이해하는 건 어려워 보인다"고 현지매체 래플러에 지적했다. 필리핀 대통령과 부통령은 6년 단임제다. ‘독재가문 시즌2’ 시대가 현실이 될지, 남은 일주일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