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언니들의 양보 없는 승부… "오백 년 동안 계속해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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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언니들의 양보 없는 승부… "오백 년 동안 계속해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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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23 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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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973년 빌리 진 킹부터 예능 '노는 언니'까지

편집자주

강소희 작가, 서효인 시인이 스포츠로 풀어내는 세상 이야기. 스포츠에 열광하는 두 필자의 시점에서 이 시대의 스포츠를 응원하고 지적합니다.


'노는 언니' 출연 중인 박세리. E채널 제공

영어 표현 중 ‘Water is wet’이 있다. ‘물은 축축하다’ 정도 되겠다. 광고업계에서는 비슷한 말로 ‘새 날아가는 소리’ 혹은 ‘밥 짓는 소리’ 같은 게 있다. 너무 당연해서 하나 마나 한 소리를 가리키는 말들이다. 2018년 7월 ‘여자가 가르치고 여자가 배운다'(이하 '여가여배')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동명의 프로젝트를 시작하며 나는 이 문장이 ‘물은 축축하다’와 같다고 생각했다. 너무 당연(했어야) 한 말. 하지만 (애석하게도) 당연하지 못한 말.

주짓수를 비롯해 농구, 축구, 스케이트보드 등 다양한 종목에 여성 강사를 섭외하고 여성 참가자들을 모아 진행하는 '여가여배'를 기획하고 운영하면서 생활 체육계에서 ‘여자가 가르치고 여자가 배우는’ 기회가 얼마나 드물었는지, 여자들이 이걸 얼마나 원하고 있었는지를 체감할 수 있었다. 내려다보는 시선도, 시혜적인 시선도, 대상화하는 시선도 없는 곳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한 번도 가져본 적 없었지만, 우리가 끊임없이 원했던 게 바로 이거라는 걸.


티캐스트 E채널 예능 '노는 언니 시즌2'에서 제1회 노는언니 피구왕 대회가 열렸다. 32인의 국가대표 선수들이 총 8팀으로 나뉘어 우승 상금 1,000만 원을 걸고 경기에 나섰다. E채널 유튜브 화면 캡처

티캐스트 E채널 예능 '노는 언니'를 볼 때도 유사한 안도감이 든다. 박세리를 비롯한 각 종목의 정상급 여자 선수들이 나와 여러 종목을 섭렵하며 최고를 겨루는 걸 보고 있노라면 세상 쾌적하고 즐거워진다. 누구보다 여유롭고 관대한 자세를 지녔으되 승부 앞에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이들은 마라 맛 고자극으로 강하고, 유연하고, 장난기 넘치고, 배려하고, 경쟁하는 여자들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준다. 그래, 내가 가장 보고 싶은,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바로 그 풍경이다. ‘노는 언니’의 회차가 더해질수록 ‘여자의 적은 여자’ 따위의 말을 도대체 누가 만들어냈는가 싶다. 나는 그가 여자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여자들을 싸잡아 내리꽂아 버리고 싶은 저열한 욕망에 사로잡힌, 여자가 아닌 사람일 거라고 추측한다.

최근 방영된 '제1회 노는 언니 피구왕 대회'에 나온 선수들을 보자. 구기부, 철인부, 카바디부, 유도부, 육상부, 투기부, 씨름부, 세팍타크로부 등 총 8팀이 나와 연맹을 맺어 피구왕을 가리는 가운데 그들이 서로에게 보이는 호감은 어찌나 거센지 화면을 찢고 여기까지 전해진다. 아~ 좋다! 이 여자들의 우정 냄새.

한편 이 프로에는 184개의 미덕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서로의 몸을 철저히 기능적으로 평가하는 선수들의 모습이다. 씨름부가 포효하며 등장할 때 유도부는 "덩치…우와…"라며 진심 어린 탄성을 내뱉고, 박세리는 "다 근육질이고 우리는 바람 빠진 풍선 같다"고 말한다. 이후 씨름부가 최약체를 지목할 때 카바디부를 고르는 이유는 "조금 왜소해서"다. 지금까지 미디어에서 질리도록 봐온 여성의 몸에 대한 평가와는 사뭇 다른 결이다. 아~ 좋다! 이 여자들의 선명한 기준.


티캐스트 E채널 예능 '노는언니2'에서 제1회 노는언니 피구왕 대회가 열렸다. 32인의 국가대표 선수들이 총 8팀으로 나뉘어 우승 상금 1,000만 원을 걸고 경기에 나섰다. E채널 유튜브 화면 캡처

당연히 강하고, 호승심이 있는 이들이 연맹을 맺기 위해 서로를 향한 구애를 할 때는 또 어떠한가. 밥만 먹으면 로프를 탈 수 있다는 유도부, 그 유도부의 기록을 아무렇지 않게 깨버리는 은퇴한 레슬링 선수. 매트 위에서 뒤집기를 시도하는 레슬링부 윤소영과 버티기에 들어가는 유도부 김성연. 곳곳에서 신음에 가까운 환호성이 터져 나온다. "너무…멋져…" "대박!" 상대적으로 연령대가 높은 구기부는 쓸데없는 데 힘을 쓰지 않겠다며 모든 겨루기에 입으로만 참여하는가 싶더니 배구 선수 출신 한유미를 내보내 한 손으로 공 잡기, 믿을 수 없이 멀리 던지기를 보여줌으로써 단숨에 기선을 제압한다. 씨름 선수 양윤서는 겨루기가 무엇이든 손을 번쩍번쩍 들고 나오는데 그렇게 그는 투포환 선수 이수정과 ‘강철 어깨들의 대결’까지 펼치게 된다. 본경기인 피구와 당최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모를 겨루기를 하면서도 일단 ‘승부’라는 게 주어지면 앞뒤 보지 않고 달려드는 여자들의 미친 기 싸움이라니. 이런 기 싸움이라면 오백 년 동안 계속해주길 바란다. 아~ 좋다! 이 여자들의 승부.

당연한 듯 남자 출연자들로 범벅이 된 방송가를 멀리 떨어져 이백 년째 지켜봐 온 입장에서 여자들이 나오면 이렇게 재밌는데 여자가 메인으로 나오는 방송이 왜 이렇게 압도적으로 적은지 새삼스러운 의문이 든다. 적절한 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기나 할까?


영화 '빌리 진 킹: 세기의 대결'(2017)에서 빌리 진 킹을 연기한 엠마 스톤(왼쪽). 이 영화는 1973년 빌리 진 킹과 바비 릭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서치라이트 픽처스 홈페이지

1973년에 있었던 테니스 성 대결을 다룬 영화 '빌리 진 킹 : 세기의 대결'(2017)에서 테니스 협회장 잭 크레이머는 남자부 상금을 1만2,000달러로, 여자부 테니스 상금을 남자의 8분의 1인 1,500달러로 정한다. 이유를 묻는 빌리 진 킹에게 그는 일단 남자는 가정을 부양해야 한다고 얘기한다. 빌리 진 킹은 자기도 가장이라고 답한다. 그러자 잭은 남자 경기가 더 흥미진진하며 인기가 많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빌리 진 킹이 승리한 여자 결승 대회 티켓이 남자 결승 대회와 똑같이 팔렸음에도 불구하고, 여자 테니스 인기가 남자 테니스 인기의 8분의 1밖에 안 된다고 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반세기 전 이야기가 마치 어제 들은 이야기처럼 생생하게 느껴지는 게 꼭 내 기분 탓은 아니겠지. 배구계를 잘 모르는 내 귀에까지 여자 배구의 불가해한 샐러리캡(연봉 총액 상한제)이 들려오니 말이다. 여자부 샐러리캡은 남자부 샐러리캡 58억1,000만 원의 절반도 안 되는 23억 원이라고 한다. 게다가 남자부에는 없는 개인 연봉 상한선이라는 이상한 규정까지 있다.

왜...? 진짜 왜? 도대체 이런 말도 안 되는 규정을 누가 만드는 걸까? (여자는 아닌 것 같다.) 인기든 흥행이든 여자 배구가 남자 배구를 훌쩍 뛰어넘은 지 오래다. 이 정도 되면 ‘아 모르겠고, 그냥 남자니까 많이 받아야지, 뭔 이유가 필요해'라고 우기는 꼴이라고밖에는 볼 수 없다.


앙효진(현대건설)이 지난 1일 경기 수원시 장안구 수원실내체육관에서 열린 프로배구 2021-22시즌 도드람 V리그 한국도로공사의 경기에서 실점한 뒤 아쉬워하고 있다. 지난 6일에는 앙효진이 연산 보수 총액을 2억 원 낮춰 자유계약선수(FA)로 재계약한 사실이 알려졌다. 이는 현대건설의 내년 시즌 샐러리캡을 고려해 자신의 보수 총액을 대폭 낮춘 것으로 풀이된다. 수원=뉴스1

제20대 대통령 당선인이 이런 말을 했다. "이 사회에 구조적인 차별은 없다"고. 얼씨구. 아니 당선인분, 여자 배구를 보라고요, 이게 구조적인 차별 아니면 대체 뭐죠? 아니 당선인분, 당신이 지명한 초대 내각 후보자들을 보라고요. 19명 중에 여자는 단 3명인데, 이게 구조적인 차별이 아니면 대체 뭐냐고요. 이 와중에 여성가족부를 없애고 '인구가족부'를 만들겠다는 소문까지 들려온다. 절씨구. 빌리 진 킹과 대결했던 바비 릭스가 "여자가 테니스 코트에 없으면 공은 누가 줍죠?"라는 망언을 하던 1973년과 뭐가 달라진 거지? 대한민국이 혹시 국가적으로 타임워프물을 찍는 건가요?

이왕 장르물로 갈 거라면 당선인이 여자의 몸으로 딱 1년만 살아보시면 좋겠다. 당신이 그렇게 좋아하는 다리 쩍 벌리기를 할 수 없을 거고요. 기차 의자에 발을 올렸다가는 '무개념 기차녀'로 욕을 오만 톤 얻어먹고 신상이 털릴 거고요. 허구한 날 말 잘라먹기를 당할 거고요. 시도 때도 없는 반말 공격에 시달리게 될 거고요. 결혼을 안 하면 안 했다고 뭐라 하고, 결혼하면 애 낳으라고 뭐라 하고, 애를 낳으면 '맘충' 소리를 듣게 될 거고요. 워킹맘으로 야근하면 독하다는 소리를 들을 거고, 정시에 퇴근하면 승진에서 제외될 거고, 일꾼이 되면서 동시에 '꽃'이 되기를 요구받을 거예요. 웃지 않으면 화났냐는 말을 들을 거고요. 회사 간부 중 80% 이상이 남자인데도 유리 천장은 없다는 소리 따위를 들을 건데요. 우연히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촘촘한 차별과 싸우며 사는 그 경험을 이야기하려면 '성별 갈라치기'라는 소리를 들어야 하고요. 자기들은 여자로 살아본 적도 없으면서 여자들이 차별받는다고 하면 왜 그렇게 아니라고 박박 우기는지 알 수가 없는 어리둥절한 상태가 될 거고요. 남녀 임금 격차만 봐도 불평등이 빨간불처럼 선명하다는 말 따위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될 거예요.


영화 '빌리 진 킹: 세기의 대결'(2017) 속 한 장면. 경기장에서 한 여성이 '빌리 진을 대통령으로'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KinoCheck.com 유튜브 캡처

영화 ‘빌리 진 킹’에서 후반부 성 대결 경기를 펼칠 때 관중석에 이런 피켓이 있다. ‘빌리 진을 대통령으로’. 이제 구조적인 차별은 없다는 소리를 하는, 멀쩡한 청와대를 놔두고 별다른 이유도 없이 굳이 집무실을 옮기겠다고 우기는, 다른 일정이 있다며 세월호 8주기 추모 행사에 불참하는, 유연 근무라는 애매모호한 말로 주 52시간 근무 폐지에 시동을 걸려는, 그런 당선인을 보면서 나는 차라리 박세리가 대통령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국제 경기를 하면서 증명된 강철 멘털! '노는 언니' 팀을 수년간 이끌어온 리더십! 준수한 외모! 화통하면서도 털털한 성품! 이 정도면 한 나라의 수장이 되기에 모자람이 없는 것 같다. 외국 수장과 골프를 치면서 외교 문제도 팡팡 잘 해결할 것 같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고? 먼저 말이 되는 정치를 해줬으면 한다. 여성과 무산자와 피해자와 노동자의 편에 서는 정치를. "대한민국, 야 너두 할 수 있어!"

강소희 작가·카피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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