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턴이 가봤다]2030여성이 이끈 '축제 같은 집회'
스스로 '개딸'이라 부르며 "검찰·언론 개혁" 외쳐
대선 전후 기성 정치와 만나 새로운 문화 만들어
온라인서 정치 공부...입법 과정에 의견 제시 활발
"청년 여성들은 변화 주도 세력이 됐다"는 평가도
지난 8일 오후 7시. '불금' 저녁 젊은 여성들이 서울 여의도로 모였다. 정치의 메카 여의도에 등장한 700여 명의 시민들은 장송곡도, 특정 정치인을 규탄하는 구호도, 촛불도 가져오지 않았다. 그러나 '할 수 있다'는 구호와 '힘내'라는 응원가에 시민들은 집회 문화를 즐겼다. 참가자의 대부분을 차지한 젊은 여성들은 주체가 되어 이끌어 갔다. 그동안 집회하면 떠올랐던 운동권 노래의 자리를 2000년대 유행했던 '소녀시대', '카라' 등 아이돌 노래가 대신했다.
'검찰개혁 가보자고', '개혁완수 홍근당근' 등 2030 세대에게 익숙한 '밈(인터넷 유행어)'은 집회의 구호가 되었다. 자유발언대에 올라선 진행자들은 자신을 '30대 개딸, 양아들'이라고 소개했다. 개딸은 tvN ‘응답하라’ 시리즈에서 아빠 성동일이 딸들을 친근하게 부르는 표현이다. 과거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이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딸에게 아빠가 필요한 100가지의 이유’라는 제목의 게시글을 본 2030 여성들이 “우리가 개딸이 되어주겠다”면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현재는 양아들(냥아들)과 함께 이 상임고문의 젊은 지지자층을 일컫는 말로 쓰이고 있다.
노래를 고르고 집회 진행을 맡았던 30대 여성 A씨는 소녀시대 노래 가사를 읊었다. 그는 "힘을 내, 이만큼 왔잖아. 세상을 뒤집자"라며 "우리가 하는 일도 세상을 뒤집을 수 있겠냐"고 참여자들의 호응을 바랐다. 반짝이는 응원봉과 박수 부채를 든 참가자들은 환호하며 '검찰 정상화, 언론 정상화'를 외쳤다.
30대 여성 B씨는 집회를 위해 파란 공룡 슈트를 준비하고 양손 가득 간식을 들고 왔다. 간식 꾸러미에는 사탕, 약과, 초콜릿 같은 주전부리에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 가사를 정성스럽게 적은 쪽지가 담겨 있었다. 그는 행사 내내 참가자와 지나가던 시민들의 사진 요청에 함께 '셀카'를 찍고, 음악에 맞춰 춤도 추며 즐겼다.
이날 참석자 중 대다수의 2030 여성들은 에어 슈트와 모자, 선글라스 등 평소 여의도서 열리는 집회에서 잘 볼 수 없는 소품을 준비했다. 흥을 돋우려는 이유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얼굴이 드러나는 것이 부담스러워서'라고 했다. 20대 여성 C씨는 "집회에 나온 것을 지인들이 아는 건 상관없다"면서도 "얼굴이 알려지면 극우 남초 커뮤니티에서 조리돌림당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늘어나는 2030 여성 참여, 정치 집회의 색다른 모습들
개혁문화제라는 이름으로 여덟 번째 행사가 열리는 동안 2030 여성들의 참여가 늘어났다. 집회를 주최한 김학현(55) 밭갈이 운동본부 대표는 한국일보와 인터뷰에서 "초반에는 600~800명 정도 왔는데 최근엔 2,000~3,000명이 꾸준히 참가한다"며 "이 중 70% 정도는 2030세대"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 "자신들의 개성이 듬뿍 담긴 문화를 이곳에서 직접 만들고 있다"며 신기해했다.
대표적으로 '검찰 정상화'라는 표현이다. 김 대표는 "개딸 중 한 명이 검찰 정상화라고 표현해 보면 어떻겠느냐고 했다"며 "586이 주도했던 과거 집회에서는 투쟁, 개혁 등을 핵심 단어로 썼지만 2030들이 되도록 긍정의 언어로 표현하려는 것 같다"고 했다. 초반에 집회를 진행하면서 나온 '검찰이나 민주당이나 다 갈아 엎자'는 주장을 개딸들은 '이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자'는 표현으로 대신하자고 했고 이에 공감한 주최측이 '개혁'과 '정상화'를 동시에 구호로 사용하기로 한 것이다.
그는 몸이 불편한 참가자에게는 먼저 공간을 마련해 주고, 주변 경찰에게는 '수고하신다'며 음료수를 먼저 건네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2030 여성들은 에어슈트를 입고 음악에 맞춰 춤추고 노래를 부르다가도 지팡이를 짚은 어르신이 집회에 참가하려고 대열에 들어 오면 자리를 내어주었다.
개혁이라는 이름 아래에 모인 '가족'
개딸과 양아들 뒤에는 '개가족'이 있었다. 초등생 아이를 데리고 나온 50대 여성은 자신을 '개이모'로, 친구와 함께 나온 60대를 비롯해 4050남성들은 자신들을 '개삼촌'이라 불렀다. 이들은 내내 행사 참가자들의 뒤를 지켰고 집회가 끝나고는 간식을 나눠주며 "조심히 가라"고 인사했다.
집회에 네 번째 참석했다는 20대 남성 E씨는 "처음엔 기존 집회들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 낯설기까지 했다"면서 "이날 행사에서는 신나게 노래도 부르는 제 모습을 보니 꽤 적응을 한 것 같다"며 웃었다. 70대 여성 F씨는 "확실히 젊은 사람들이 앞장서 주니 으쌰으쌰 하고 좋다"며 "개딸들이 고맙다"고 했다. 70대 남성 G씨는 직접 발언대에 올라 "나는 개할부지다"라며 "여러분들은 개딸이지요. 다 함께 갑시다"라고 격려했다.
이들은 서로의 감정을 보듬기도 했다. 행사장 바로 옆에서 맞불 집회를 여는 보수 진영 인사의 욕설에 목소리를 높이던 70대 여성에게 20대 여성 참가자들이 진정하시라며 초콜릿을 건넸고, 화가 나 붉어진 얼굴에 부채질을 해주며 달랬다. 40대 남성 H씨는 "2030 여성들의 이런 마음 씀씀이가 울컥해질 때도 있다"고 했다. 자신을 '개이모'라 자청한 60대 여성 I씨는 "개딸, 양아들, 젊은이들이 걱정이 돼서 나왔다"고 소개했다.
2030의 적극적 참여는 그동안 집회를 주도하던 4050의 마음을 움직였다. 김 대표는 "나도 젊을 적에 잘 몰랐으니 당연히 지금 2030도 정치에 대해 잘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그런데 그들이 마음대로 하도록 맡겼더니 너무 잘해서 그날 집에서 아무도 모르게 울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2030에게) 맡기면 이렇게 잘하는데 왜 우리가 잘난 척을 했을까 하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덧붙였다. 김 대표는 원래 행사 사회를 맡기던 사람 대신 개딸과 양아들에게 사회를 맡기기로 했다고 했다.
서로 도와주며 배워가는 '품앗이' 정치 공부
경험이 많지 않은데도 능숙하게 진행을 하고 집회를 즐길 수 있던 바탕에는 '품앗이 공부'가 있었다. 커뮤니티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어려운 용어를 유래부터 설명하거나 매달 정치 관련 일정을 정리하여 올라온다. 피차 배우는 입장으로 서로를 돕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이다. 이를 두고 강유정 강남대 교수는 유튜브 '김어준의 다스뵈이다'에서 "(개딸들은) 아는 것을 힘으로 군림하지 않는다"며 "수평적인 여성 연대의 특성이 여기서도 잘 드러난다"고 설명했다.
이날 집회에 참석한 20대 여성 J씨는 "2030 정치 유튜버들이 늘었다"며 그들의 영상을 보고 공부한다고 말했다. 30대 여성 K씨는 "정치 관련 소식을 들으면 사실이 맞는지 먼저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고 답변했다. 제20대 대통령 선거를 거치며 무분별하게 유통되는 가짜 뉴스와 허위 정보에 팩트체크도 없이 속아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기 위해 직접 지지자를 찾아 나서기도 한다. 트위터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프로필에 자신의 정치 성향을 밝히며 트친소(트위터 친구를 소개합니다의 줄임말로, 새로운 SNS 친구를 구하는 행위)를 여는 경우도 있다. 아직 정당에 가입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짤과 재미있는 유행어를 보여주며 참여를 이끈다.
"세대가 바뀌면 문화도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개딸들의 정치에는 이들의 문화가 녹아들어 있다. 이들이 자주 사용하는 말은 당 내부까지 널리 퍼지고 있다. 여성 당원들의 상당수가 활동하고 있는 커뮤니티에서 시작된 '~잔아'라는 말투(잔아체)가 세대와 성별을 불문하고 쓰이는 것이다. 이 상임고문은 지지자들이 보낸 메시지에 "우리 개딸님 정말 고맙잔아"라고 답장했다.
말을 안 듣는 의원들을 어르고 달래자는 의미에서 채널A '요즘 육아-금쪽같은 내새끼'에서 따와 '민쪽이(민주당과 금쪽이의 합성어)'라 일컫는 등 재치 있는 용어도 만들어낸다. 동물 친칠라와 닮았다며 이 상임고문을 '잼칠라'라고 친근하게 부르기도 한다. 닌텐도 스위치의 게임인 '모여봐요! 동물의 숲'에서 민주당 아이템을 만들어 공유하는 경우도 있다. 아이돌 팬덤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 사진과 함께 식사 인증샷을 남기는 문화인 '예절샷'을 찍을 때는 아기자기하게 꾸민 의원들의 사진을 사용한다.
개딸들은 "과거에는 진지하게만 다가갔다면 지금은 더 즐겁게 다가갈 수 있다(B씨)", "정치 참여의 세대가 바뀌면 문화도 바뀌는 것(L씨)", "우리가 이렇게 즐김으로써 어린 아이들까지 모두가 어렵지 않게 소통할 수 있어 참여도를 높일 수 있다(D씨)"와 같은 의견을 보였다.
강 교수는 "(개딸들에게는) 엠넷 '프로듀스' 시리즈에서 투표 조작 정황을 파헤쳤던 자신감이 남아 있다"며 "그러한 학습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열정과 애정, 연대감을 가지고 시간 내에 목표를 완수하기 위해 서로를 격려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2016년 방영됐던 '프로듀스' 시리즈는 시청자의 문자 투표를 반영해 서바이벌 형식으로 최종 데뷔할 연습생이 결정되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다. 하지만 득표수가 특정 숫자의 배수로 반복된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누리꾼들은 2019년 진상규명위원회를 꾸리고 제작진을 고발했다. 결국 담당 PD는 실형을 선고받았고, 피해를 본 연습생들은 피해 보상을 받았다.
강 교수는 "모두를 안고 간다는 태도는 지금까지의 정치에서 본 적 없다"며 '휴덕(연예인 좋아하는 것을 잠시 멈추는 것)'은 있어도 '탈덕(연예인 좋아하는 것을 아예 그만두는 것)'은 없다는 것이 이들의 마음이라고 말했다.
'불꽃'으로 시작해서 '불길'이 되기까지
개딸들은 이번 대선을 기점으로 모였다. J씨는 "정치 참여 경험이 전혀 없었는데 커뮤니티를 통해 집회를 알게 됐다”며 “오늘로 두 번째 참여"라고 말했다. L씨는 "2016년 탄핵 촛불 집회 이후로 한동안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했지만 "이번 대선 이후 문제를 느끼고 처음으로 정당까지 가입했다"고 답했다.
이들이 지핀 불은 쉽게 꺼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은 대선에서 패배했지만 개딸들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말한다. 정치인을 지지하는 것을 넘어 정치판을 바꿔보겠다고 움직였다. 더쿠, 여성시대, 밀리토리네, 우리 동네 목욕탕 등의 커뮤니티에서 의원에게 후원하거나 정당에 가입하는 방법이 카드 뉴스로 배포되기 시작했다. 당원 가입 시 이 상임위원이나 박 위원장의 이름을 적자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커뮤니티는 집회에 참석하는 여성들에게 있어 교류의 장이다. 집회에 입고 갈 에어 슈트를 골라주는가 하면 매주 참석 여부를 조사한다. 현장에 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유튜브 중계를 보는 '달글('달리는 글'의 줄임말로, 하나의 주제에 대해 댓글로 얘기하는 글)'을 만들어 실시간으로 소통한다. 집회 후기 게시글에는 "고생했잔아", "멀리서도 응원한다"는 격려들이 많다.
변덕스러운 집회 일정을 가장 먼저 알 수 있는 곳도 커뮤니티다. 극우 단체들이 집회를 반대하는 '맞불 집회'를 놓으면서 집회 방식이 게릴라전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15일에도 예정되었던 시위가 취소되자 "간식도 다 주문하고 집회에 맞춰 근무 스케줄을 짜놨는데 아쉽다", "집회 가려고 연차까지 냈는데 혼자 에어 슈트 입고 1인 시위나 할까"와 같은 게시글이 올라왔다. 또한 맞불 집회 참여자가 폭력이나 폭언을 행사할 수 있으니 '경찰이나 개삼촌들에게 저지를 부탁하라'는 대응 수칙도 공유한다.
16일 민주당사 앞에서 열릴 예정이던 집회는 극우 보수단체의 맞불 집회로 인해 자리를 옮겼다. 반대 진영의 시민이 싸움을 걸어오면 '개삼촌'들이 나서서 말렸다. 집회가 끝나고 집회 주최 측은 국회의사당역에 곳곳에서 귀갓길을 안내했다. 이날 커뮤니티에는 "지하철역 아래에서도 지켜주신 개삼촌 분들 정말 감사하다. 든든했다"는 후기들이 올라왔다.
반짝 관심 대신 멀리 보고 권리당원 가입까지 하다
2030 여성들을 움직이게 한 것이 간절함이었다면 이들을 지속하게 하는 것은 효능감이다. 김용민 민주당 의원은 15일 유튜브 '김어준의 다스뵈이다'에 출연해 당의 주요 정책과 입법의 방향을 정하는 데 있어서 "개딸들이 굉장히 큰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심지어 반대 의견을 내는 의원들을 향해서도 "몰아세우며 비판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말해주니까 의원들 중에는 마음을 바꾼 사람들도 있다"고 말했다.
정당까지 가입하며 단순한 지지자를 넘어 당원으로서의 정체성을 뚜렷하게 가진다. 얼마 전에는 권리당원의 3%가 동의하면 의안을 제출할 수 있다는 당규를 찾아내 각종 SNS에 알렸다. 더 나아가 의원총회를 열기 위해 온라인 서명 플랫폼을 공유하며 참여를 독려했다. 50대인 김학현 대표는 "나도 이런 당규가 있는지도 몰랐다"며 "(개딸들은) 자신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 정당하게 행사한다"고 감탄했다.
김 대표는 개딸들이 정치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젊은이들을 위해 헌신하기로 약속했다"고 말했다. 청년 정치에 자금이 필요하다면 엄마, 아빠가 도와주겠다고 한다. 그는 청년층이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사무실을 개방한 데 이어 10~30대 지방선거 후보들과 소통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청년들이 스스로 깨지고 부딪히면서 이 세상을 바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개딸들은 민주당의 '변화'를 지지하고 있다"
박구용 전남대 철학과 교수는 한국일보와 전화 인터뷰를 통해 개딸들을 포함한 2030 여성의 정치 참여를 두고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현상"이라고 평가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노사모', 안철수 대통령직인수위원장의 지지 세력, 문재인 대통령의 '문파'를 거쳐 개딸까지 감안하면 낯설지 않은 모습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박 교수는 "개딸들이 정치의 놀이화를 이뤘다"며 "기존 정치 세력과는 다른 양상"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여성이 사회 변화의 세력이 되어 가는 것은 전 세계적 현상"이라며 "2030 여성들은 앞으로도 정치적 영향력을 지닐 것"이라고 내다봤다. 다만 "민주당 내에서 2030 여성들의 의견과 다른 목소리가 나왔을 때 그들에게 얼마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개딸은 민주당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당의 변화를 지지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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