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사'트라우마 극복 위해 시작한 새벽운동...운명처럼 한 생명을 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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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트라우마 극복 위해 시작한 새벽운동...운명처럼 한 생명을 살렸다

입력
2022.04.26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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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김광규 소방장

편집자주

의료계 종사자라면 평생 잊지 못할 환자에 대한 기억 하나쯤은 갖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생명을 구한 환자일 수도 있고, 반대로 자신에게 각별한 의미를 일깨워준 환자일 수도 있다. 아픈 사람, 아픈 사연과 매일 마주하는 의료종사자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소방대원들은 위급한 상황과 처참한 사고현장을 자주 목격합니다. 때문에 많은 대원들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겪곤 합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2009년 임용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산에서 굴토작업 중인 굴삭기가 커다란 바위에 깔리는 사고가 발생했고, 현장에서 크게 훼손된 시신을 처리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었는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아침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12년 가까이 운동을 하다 보니 운동장은 제2의 직장처럼 되었습니다.

운동을 하다 보면 크고 작은 사고가 생깁니다. 그때마다 저는 응급처치를 도맡아 했습니다. 트랙에서 미끄러지면서 발생한 손가락 골절과 탈골을 처치한 적도 있었고, 발목이 접질린 시민을 이송한 적도 있었습니다. 벌에 쏘인 시민을 도왔고, 심지어 배수로에 고립된 새끼 고양이를 구출한 적도 있었습니다.

운동장을 걷다가 갑자기 쓰러진 백발의 70대 노인도 기억납니다. 입에 거품을 물고 몸을 떨기에 간질환자로 판단해 응급처치를 했는데, 상황이 나아지지 않아 구급대에 인계했습니다. 다행히 치료가 잘되어 그 노인은 다시 운동장에 나왔지만, 또 쓰러졌습니다. 이 상황을 몇 차례 반복적으로 겪다 보니 안정을 취하면 몇 분 후 원상태로 회복되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어쨌든 그 노인 오시는 날엔 항상 긴장한 상태로 운동을 해야 했습니다.

2020년 11월 1일을 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어김없이 아침 6시경 운동장에서 몸을 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운동하던 남성 한 분이 갑자기 바닥에 쓰러졌습니다. 주말이라 사람이 많았지만 다들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도 다가가지 않았습니다. 소방대원의 본능으로 제가 신속히 다가가 괜찮냐고 묻자 그 남성은 괜찮다고 대답했지만, 이내 의식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저는 주위에 있던 분에게 119신고를 부탁한 뒤 즉각 심폐소생술에 들어갔습니다. 쓰러진 남성은 혀가 입안으로 말려 들어가면서 힘겹게 호흡을 했고, 그 거친 호흡마저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반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오른쪽 다리 일부가 퍼렇게 변해 있었으며 맥박을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죽었다는 주위의 수근거림이 들렸습니다. 저 역시 가망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구급차가 올 때까지 10여 분 정도 심폐소생술을 이어갔습니다.

1분이 1시간처럼 느껴졌습니다. 평소 현장에 도착하면 신고자들이 '왜 이렇게 늦게 왔느냐'고 화내는 경우를 자주 접하는데, 그 마음을 저도 알 것 같았습니다. 잠시 후 구급차가 도착했고, 저는 구급대원들을 도와 심장충격기를 부착했습니다. 1번, 2번, 그리고 3번째 심장충격에서 다행히 그는 의식을 되찾았습니다.

제가 심폐소생술하는 모습이 블랙박스 영상에 찍혀 소개되는 바람에, KBS에서 인터뷰 요청까지 들어왔습니다. 발표 울렁증이 있어 거절하고 싶었지만, 제 인생에 TV 출연 기회가 다시는 없을 것 같아 용기를 내고 인터뷰에 응했습니다. 아내는 '갓난아기도 말문을 트이게 한다'는 신비의 명약(알고 보니 청심환이었습니다)을 제게 주었습니다. 방송 인터뷰라 수많은 스태프와 휘황찬란한 조명을 생각하며 며칠 동안 상상의 나래를 펼쳤는데, '뜻밖에' PD 한 분만 오셔서 '아주 편안하게' 인터뷰에 응한 기억이 납니다.

TV 출연도 뜻밖이었지만, 이로 인해 색다른 경험이 이어졌습니다. 소방청이 주관하는 'S.A.V.E. 모델'로 선발돼 소방캘린더 제작에 참여하는가 하면, 2021년에는 생명보험사회공헌재단에서 '구조영웅'에게 주는 '생명존중대상'을 수상했습니다.

신참 소방대원 때 겪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시작한 아침운동, 그 운동 중에 이뤄진 생명구조, 그 덕에 TV 출연과 소방청 외부 활동, 큰 상 수상까지. 운명처럼 상황이 전개됐고, 12년 차 평범한 소방대원에겐 그 심폐소생술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된 것 같습니다.

심폐소생이 언제나 '해피엔딩'은 아닙니다. 수많은 심폐소생술을 했지만, 내 응급처치에 한 생명이 달려있다고 생각하면 지금도 겁이 납니다. 제 앞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 두려움이 생깁니다. ‘왜 하필 내가 여기에 있었을까’하는 생각부터, ‘내가 뭘 잘못한 건 아닐까. 혹시 무슨 소송에 휩싸이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까지, 여러 상념이 떠오릅니다. 무슨 소송 걱정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실제 응급처치로 인해 소송에 휩싸인 구급대원들이 많습니다.

운동장에서 그 일이 있고 난 며칠 후, 남성분이 건강한 모습으로 찾아왔습니다. 너무도 반갑고 감사했습니다. 만약 잘못되었더라면 최초 응급처치자로서 저는 큰 심적 고통에 시달렸을 겁니다. 저도 그 분을 살렸지만, 그 분도 저를 살린 거나 다름없습니다.

태백소방서 119구조대원

※잊지 못할 환자에 대한 기억을 갖고 계신 의료계 종사자분들의 원고를 기다립니다. 문의와 접수는 opinionhk@hankookilbo.com을 이용하시면 됩니다. 선정된 원고에는 소정의 고료가 지급되며 한국일보 지면과 온라인 페이지에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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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린 환자, 나를 깨운 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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