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친코’ 촬영을 ‘달러벌이’라 했던 윤여정의 유머와 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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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 촬영을 ‘달러벌이’라 했던 윤여정의 유머와 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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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13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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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 여러분들이 잘 아는 배우의 덜 알려진 면모와 연기 세계를 주관적인 시선으로 전합니다.

윤여정의 영화 속 다양한 모습.

애플TV플러스 드라마 ‘파친코’에는 인상적인 대목이 여럿 있다. 배우 윤여정의 연기는 그중 하나다. 배우들의 호연이 어우러진 장면들 속에서도 그의 모습은 유난히 눈길을 잡는다. 배우들 다수가 덜 알려진 얼굴들이라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윤여정을 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단연’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파친코’의 한 장면만 짚어보자. 일본 오사카 재일동포 선자(윤여정)는 손자 솔로몬(진하)의 부탁으로 도쿄 한 재일동포의 집을 방문한다. 솔로몬의 회사는 도심에 위치한 이 동포의 집을 사들여 호텔을 짓고 싶어한다. 솔로몬은 집주인과 동년배인 선자를 앞세우면 일이 생각대로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집주인이 두 사람에게 식사대접을 하는데, 선자는 한술 뜨자마자 놀란다. 한국에서 재배한 쌀로 지은 밥이라는 점을 알아차려서다. 집주인은 그 모습에 처음 만난 선자에게 마음을 활짝 연다. 윤여정은 선자의 놀란 표정을 호들갑스럽지 않게, 지나치게 점잖지도 않게, 상대방이 호기심과 호감을 살 정도로 표현해낸다. 난관에 부딪혔던 솔로몬의 일이 쉽게 풀리는 후속 장면은 윤여정의 연기로 설득력을 얻는다.

윤여정은 최근 선보인 드라마 '파친코'에서 격동의 시기를 인고한 재일동포 여인 선자를 연기했다. 애플TV플러스 제공

화면으로 윤여정을 처음 마주한 때는 1987년으로 기억한다. MBC 인기 드라마 ‘사랑과 야망’을 통해서다. 윤여정은 의상디자이너 혜주를 연기했다. 강원 춘천에서 막 서울에 온 미자(차화연)의 재능을 알아보고 배우 데뷔를 도와주는 인물이다. 잠자리테 안경을 쓴 외모와 칼칼한 목소리가 인상적이었다. 차가운 도시 여자 이미지였다고 할까.

시간이 흘러 윤여정의 옛 영화들을 봤다. 스크린 데뷔작인 ‘화녀’(1971)와 ‘충녀’(1972)는 드라마 속 윤여정의 인상과 달랐다. 김기영(1919~1998) 감독이 연출한 두 영화에서 윤여정은 시골 출신으로 서울 한 부유한 집에서 가정부로 일하게 된 명자(‘화녀’), 불우한 가정에서 자라 호스티스가 된 또 다른 명자(‘충녀’)를 각각 연기했다. 억압적 가부장제에서 점점 광기에 휩싸이다 파괴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는 공통점을 지녔다. 김 감독은 “청승맞아 보여서” 윤여정을 캐스팅했다고 알려졌는데, 두 영화를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윤여정의 영화 '에미'에서 딸을 납치한 인신매대단에 복수하는 유명 방송 진행자를 연기하며 파격적인 모습을 선보였다. 황기성 사단 제공

연기 복귀 직후 출연한 영화 ‘에미’(1985)는 윤여정의 이중적인 면모를 동시에 보여준다. 윤여정은 홀로 고교생 딸을 키우는 유명 방송 진행자 홍 여사를 연기했다. 자가용을 운전하고, 루이비통 핸드백을 들고 다니는 세련된 중년여성이다. 딸이 어느 날 인신매매단에 납치된 후 홍 여사의 인생은 지옥이 된다. 범죄자들의 단죄를 원하나 공권력은 무기력하다. 홍 여사는 인신매매단원 하나하나를 찾아내 처단한다. 지금 만들어져도 파격이라는 수식이 따를 내용. 윤여정이 있었기에 제작이 가능했던 영화다.

윤여정은 한동안 스크린에서 떨어져 있다가 임상수 감독의 ‘바람난 가족’(2003)을 기점으로 영화 출연을 재개했다. 임 감독, 홍상수 감독과 즐겨 작업했다. 윤여정의 시크하면서도 도발적인 이미지는 임 감독에 의해 가장 적절히, 가장 많이 활용돼왔다. 윤여정은 내레이션으로 참여한 ‘그때 그사람들’(2004)을 포함해 개봉을 앞둔 ‘행복의 나라로’까지 임 감독 영화에 줄곧 함께 해왔다. 임 감독은 윤여정을 ‘윤 여사님’이라고 부르곤 하는데, 윤여정은 이 호칭을 싫어한다고 한다.

영화 '돈의 맛'에서 재벌가 안주인 백금옥을 연기한 윤여정은 임상수 감독 영화에 매번 출연하며 페르소나 같은 역할을 해왔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카메라 밖 윤여정은 유머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다. 한 영화인이 “개그맨이 따로 없다”고 할 정도로 주변사람들을 곧잘 웃긴다. 캐나다에서 ‘파친코’를 촬영 중일 때 지인이 근황을 물으니 ‘달러 벌고 있다’는 짧은 문자메시지를 보냈다고 한다. 인터뷰로만 몇 차례 자리를 함께 했으나 그가 어떤 식으로 사람들을 즐겁게 할지 짐작은 간다. 인터뷰 때 그는 의외로 수다스러웠고, 만담하듯 이런 저런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질문할 틈이 좁을 정도였다. 돌이켜보면 상대방을 편안하게 해주기 위한 방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배우가 나이 들어서도 연기활동을 이어가며 대중의 갈채는 받는 것만큼 행복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 배우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잠시나마 위안을 얻는다.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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