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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에 대한 의리로 70년 전통 이은 고래고기 전문점

입력
2022.04.16 08:00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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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장생포 고래고기원조할매집
3대째 지켜온 고래고기 음식 명가
포경금지·보호종 확대로 폐업 위기
수급 불안정… 서민 음식은 '옛말'
수십 년 단골이 노포의 장수 비결

1968년 장생포 고래고기 해체 작업장 모습. 큰 고래를 해체하는 작업은 아이들에게도 흥미로운 볼거리였다. 울산시 남구 제공

1968년 장생포 고래고기 해체 작업장 모습. 큰 고래를 해체하는 작업은 아이들에게도 흥미로운 볼거리였다. 울산시 남구 제공

울산 남구 장생포에 가면 개가 만 원짜리 지폐를 입에 문 조형물이 있다. 장생포에 포경(捕鯨·고래잡이) 산업이 활발하던 1970~80년대를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흔히 호황을 누리던 시절을 일컬어 ‘개도 만 원짜리를 물고 다녔다’는 표현을 쓰긴 하지만 말로 듣는 것과 눈으로 보는 것은 천지차이다. 비록 조형물이라 해도 말이다. 어느 정도였기에 이런 조형물까지 세웠을까.

1951년부터 3대에 걸쳐 70여 년간 장생포를 지키고 있는 향토 음식점 '고래고기원조할매집'. 울산=박은경 기자

1951년부터 3대에 걸쳐 70여 년간 장생포를 지키고 있는 향토 음식점 '고래고기원조할매집'. 울산=박은경 기자

답을 찾으러 노포(老鋪)로 간다. 세월이 지나도 그 자리인 노포에는 마을의 역사와 삶이 촘촘하게 녹아 있다. 70여 년간 장생포를 지키고 있는 향토 음식점 ‘고래고기원조할매집’이 그렇다.

울산 하면 고래, 고래 하면 장생포… 상업포경 금지로 쇠락

국내에서 고래 1번지로 통하는 울산 장생포항. 장생포항을 마주 보고 고래고기 음식점 10여 곳이 줄지어 들어서 있다. 울산=박은경 기자

국내에서 고래 1번지로 통하는 울산 장생포항. 장생포항을 마주 보고 고래고기 음식점 10여 곳이 줄지어 들어서 있다. 울산=박은경 기자

12일 오후, 장생포 고래고기원조할매집으로 향했다. 봄인지 여름인지 한낮기온은 벌써 25도를 오르내린다. 고래길로 불리는 왕복 2차선 도로에 접어들자 기다렸다는 듯 시원한 바다가 펼쳐진다. 때마침 관광객을 태운 고래탐사선이 출항한다. 바다를 마주 보고 고래고깃집 10여 곳이 줄지어 서 있다. 살아서든 죽어서든 지금도 여전히 고래는 장생포를 먹여 살리는 중책을 맡은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윤경태(59) 고래고기원조할매집 대표는 “고래잡이가 한창일 때는 포경선이 들어오면 마을 전체에 잔치가 벌어졌다”며 “해체작업을 구경하려는 이들로 포구가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회상했다.

1970년대 장생포 고래잡이 부두 모습. 포경선이 배 옆에 고래를 낀 채 귀항하면 마을에서는 잔치가 벌어지곤 했다. 울산시 남구 제공

1970년대 장생포 고래잡이 부두 모습. 포경선이 배 옆에 고래를 낀 채 귀항하면 마을에서는 잔치가 벌어지곤 했다. 울산시 남구 제공

장생포의 전성기는 189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러시아 황태자 니콜라이 2세는 일본으로 가던 중 장생포 앞바다에서 큰 고래 떼를 발견했다. 이후 1899년 러시아 포경회사가 태평양 일대에서 잡은 고래를 해체하는 장소로 사용하면서 장생포는 고래잡이의 전진기지가 됐다. 마을 사람들은 고래를 잡고, 해체하고, 이를 내다팔며 생계를 꾸렸다. ‘울산 군수 하느니 고래잡이 배를 탄다’고 할 만큼 고래로 풍족하게 먹고 살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1986년 국제포경위원회(IWC)가 상업포경을 금지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은 하나둘 마을을 떠났고, 서민 대표 음식으로 꼽히던 고래고기도 귀한 음식이 됐다. 윤 대표는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돼지고기보다 흔하고 값싼 단백질 공급원이 고래고기였지만 지금은 소고기보다 비싸다”며 옅은 한숨을 내뱉었다.

죽이면 불법, 죽으면 합법… 몸값 치솟는 고래고기

포경이 금지된 이후 국내에선 '혼획된 고래'에 한해서만 위판과 유통을 허락했다. 다른 어종을 잡으려 쳐놓은 그물에 우연히 걸려 죽은 고래만 먹을 수 있다는 얘기다. 물론 이 가운데서도 참고래, 귀신고래, 북방긴수염고래, 상괭이 등 12가지 보호종은 예외다. 주로 식탁에 오르는 건 밍크고래나 돌고래인데, 맛은 밍크고래를 더 쳐준다.

2020년 6월 23일 강원도 삼척항에서 한 어민이 그물에 걸려 죽은 밍크고래를 크레인으로 인양하고 있다. 이 밍크고래의 위판가격은 9,800만 원으로 당시 윤경태 고래고기원조할매집 대표가 낙찰받았다. 고래고기원조할매집 제공

2020년 6월 23일 강원도 삼척항에서 한 어민이 그물에 걸려 죽은 밍크고래를 크레인으로 인양하고 있다. 이 밍크고래의 위판가격은 9,800만 원으로 당시 윤경태 고래고기원조할매집 대표가 낙찰받았다. 고래고기원조할매집 제공

원조할매집도 1톤 정도 크기의 밍크고래만 취급한다. 문제는 공급이다. 필요할 때마다 척척 들여올 수 있는 게 아니다 보니 고기 확보 여부에 따라 장사가 좌지우지되기도 한다. 다섯 달 동안 한 번도 고래 경매가 열리지 않아 가게 문을 닫은 적도 있다. 이 때문에 윤 대표는 밍크고래를 위판장 경매에 부친다는 소식이 들리면 제주도부터 강원도까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바로 현금을 싸들고 달려간다. 그는 “4~5개월 만에 경매가 열릴 때는 6,000만 원이면 살 수 있던 고래 값이 1억3,000만 원까지 오른다”며 “최근 2년 사이에도 평균 경매가격이 2배나 올랐다”고 말했다.

안 먹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먹어본 사람은 없다

윤 대표가 고래고기 수급을 책임지고 있다면 요리 등 가게 운영은 아내 신수민(54)씨 몫이다. 경남 통영이 고향인 신씨는 해산물만큼은 나름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한다. 그런 신씨도 고래고기는 울산에 시집와서야 처음 접해봤단다.

3대 주인인 신수민씨가 배달주문 접수 후 고래고기를 썰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매장을 찾는 이는 줄었지만 택배 등 배달 손님은 꾸준하다. 울산=박은경 기자

3대 주인인 신수민씨가 배달주문 접수 후 고래고기를 썰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매장을 찾는 이는 줄었지만 택배 등 배달 손님은 꾸준하다. 울산=박은경 기자

고래를 먹는다는 것조차 낯설어하던 그녀가 고래고기전문점을 운영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신씨는 “아이를 낳고 시할머니, 시어머니와 함께 4대가 같이 살았다”며 “어른들이 하시는 걸 거들다 보니 자연스레 내가 맡아 하게 됐다”고 말했다.

고래고기원조할매집 간판에는 창업주 고 최말선(왼쪽부터)씨, 2대 주인 고 박숙자씨, 현재 주인 신수민씨의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다. 울산=박은경 기자

고래고기원조할매집 간판에는 창업주 고 최말선(왼쪽부터)씨, 2대 주인 고 박숙자씨, 현재 주인 신수민씨의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다. 울산=박은경 기자

고래고기원조할매집은 신씨의 시할머니인 고 최말선씨가 창업주다. 1945년 해방 이후 소일거리 삼아 고래고기 몇 점씩을 떼어다가 좌판에서 팔기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됐다. 1951년 식탁 2개에서 출발한 가게는 며느리인 고 박숙자씨를 거쳐 손자며느리인 신씨에 이르는 동안 100석 규모로 커졌다.

그러나 몸집을 키운 가게와 달리 고래고기 시장은 포경 금지로 점점 설 자리를 잃어 갔다. 장사를 접을까도 싶었지만 멀리서 찾아오는 손님들을 내칠 수는 없었다. 신씨는 “2년 넘게 주말마다 가게에 들른 부부가 있었는데 묘한 책임감과 자부심을 느꼈다”며 “손님들을 생각하면 적자를 보더라도 차마 문을 닫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고래고기 중 턱밑 뱃살을 얼려 내놓는 '우네'는 참치회와 비슷하지만 더 쫄깃하고 고소한 맛을 낸다. 미식가들 사이에서도 최고로 꼽힌다. 울산=박은경 기자

고래고기 중 턱밑 뱃살을 얼려 내놓는 '우네'는 참치회와 비슷하지만 더 쫄깃하고 고소한 맛을 낸다. 미식가들 사이에서도 최고로 꼽힌다. 울산=박은경 기자

이날도 유일한 손님은 40년 단골과 그 일행이었다. 경남 창원에서 지인들과 함께 방문했다는 안정환(55)씨는 “학창시절 부모님과 자주 찾던 가게라 타지에 있어도 종종 생각이 난다”며 “단순히 고기를 먹는 게 아니라 어릴 적 향수를 먹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고래고기 부위는 48가지로 나뉘는데 이 중 식당에서 맛 볼 수 있는 부위는 12가지로 추려진다. 단골들은 12가지 중에서도 턱밑 뱃살인 ‘우네’를 최고로 꼽는다. 참치회처럼 살짝 얼려 내놓는 우네는 씹으면 씹을수록 담백하고 고소한 맛을 낸다. 안씨를 따라 처음 고래고깃집에 와서 우네를 맛봤다는 김영운(69)씨는 “홍어처럼 호불호가 갈린다고 해서 긴장했는데 육고기나 참치보다 식감도 맛도 뛰어나다”며 연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비결은 '며느리' 손맛… 보호종 확대에 명맥 끊길 위기

70년 넘게 원조할매집에 손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대를 거쳐 며느리들에게 전해진 손맛에 있다. 단순히 삶아 내는 수육에 그치던 고래고기 조리법은 이 손맛을 통해 육회, 찌개, 곰탕, 두루치기 등 다양한 메뉴로 확대됐다.

고래고기원조할매집은 처음 고래고기를 접하는 사람들도 거부감 없이 먹을 수 있도록 다양한 조리법을 개발했다. 울산=박은경 기자

고래고기원조할매집은 처음 고래고기를 접하는 사람들도 거부감 없이 먹을 수 있도록 다양한 조리법을 개발했다. 울산=박은경 기자

비록 죽은 고래로 만드는 음식이지만 갓 잡은 고래 못지않은 신선도를 고집해 온 것도 비결이다. 낙찰받은 고래는 즉시 해체해 냉동고에 보관하고, 요리하기 3~4일전부터 김치냉장고에서 서서히 해동한다. 녹이는 과정에서 조직이 변하는 걸 막기 위해서다. 지역 대표 향토음식점으로 자리 잡으면서 2012년 당시 농수산식품부와 한식재단이 선정한 '대한민국 100대 노포 맛집'으로 지정됐고, 고래고기를 좋아하는 일본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여행상품 코스로 개발되기도 했다.

3대 주인인 신수민씨가 2대 주인인 시어머니 고 박숙자씨의 이야기가 실린 과거 신문기사를 꺼내 보고 있다. 고래고기원조할매집은 지역 대표 음식점으로 자리 잡으면서 2012년 농수산식품부와 한식재단이 선정한 '대한민국 100대 노포 맛집'으로 지정됐고, 고래고기를 좋아하는 일본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여행상품 코스에 포함되기도 했다. 울산=박은경 기자

3대 주인인 신수민씨가 2대 주인인 시어머니 고 박숙자씨의 이야기가 실린 과거 신문기사를 꺼내 보고 있다. 고래고기원조할매집은 지역 대표 음식점으로 자리 잡으면서 2012년 농수산식품부와 한식재단이 선정한 '대한민국 100대 노포 맛집'으로 지정됐고, 고래고기를 좋아하는 일본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여행상품 코스에 포함되기도 했다. 울산=박은경 기자

그러나 언제까지 명맥을 이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정부가 국내 해역에서 서식하는 모든 고래류를 해양보호생물로 지정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탓이다. 밍크고래가 보호종으로 지정되면 무조건 유통이 금지돼 가게는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 신씨는 “대학생인 아들이 결혼해서 가업을 이어가겠다고는 하지만 고래 수급 자체가 안 되면 끝이지 않겠냐”며 “고래를 보호하는 것도 좋지만 하나의 음식문화인 고래고기 식당도 보호할 수 있는 방안을 같이 고민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울산= 박은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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