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군 침공 초기 집중 공격… 건물 대다수 초토화
희생자 수색부터 난관…인적·물적 피해 막대할 듯
우크라 검찰, 전쟁범죄 4,684건 수사 "처벌할 것"
동부 병력 집중… 제2의 부차, 마리우폴 참사 우려
“제가 내던져진 곳이 무덤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북서쪽 도시 보로댠카에 사는 주민 페트로 티텐코는 지옥 같은 시간들을 떠올리며 공포에 몸서리쳤다. 그는 지난달 18일 밤 동생 안부를 확인하려 지하 은신처 밖으로 나왔다가 러시아군에 붙잡혔다. 병사들은 그를 결박하고 머리에 자루를 씌운 뒤 숲으로 끌고 갔다. 사흘 밤낮 가혹 행위가 이어졌다. 총살 위협은 기본이었고, 무차별 구타에 탱크 배기가스를 억지로 들이마시게 하는 고문도 당했다. 죽지 않고 풀려난 게 기적이었다. 페트로는 “러시아군 검문소를 지날 때마다 군사장비를 볼 수 없도록 고개를 숙여야 했다”고 5일(현지시간) 영국 가디언에 증언했다.
우크라이나가 키이우 외곽 도시들을 수복한 뒤 드러난 러시아군의 민간인 학살과 고문 등 극악무도한 만행에 전 세계가 경악했다. 부차에서 이날까지 공식 확인된 사망자만 320명이 넘었다. 여러 도시를 둘러본 우크라이나 정부가 “부차보다 훨씬 참혹하다”며 분노했던 보로댠카에서도 속속 참상이 전해지고 있다.
실제 현실은 끔찍했다. 포탄에 맞아 검게 탄 시신, 자전거를 타다 살해당한 시신, 자동차 안에서 총에 맞아 즉사한 시신 등이 널브러져 있었다. 한 주택 뒷마당에선 양손이 등 뒤로 결박된 채 고꾸라진 시신도 나왔다. 경찰은 “머리에 총을 맞고 처형된 것”이라고 말했다. 시신 수색을 돕고 있는 주민 헤나디 아브라멘코는 “전날엔 7구를 수습했고, 오늘은 반나절 동안 벌써 6구를 발견했다”고 미국 CNN방송에 말했다.
부차에서 북서쪽으로 25㎞ 떨어진 도시 보로댠카는 고속도로가 지나가는 교통 요지라서 키이우로 출퇴근하는 시민들이 많이 살았다. 그러나 이런 지리적 이점 때문에 보로댠카는 전쟁 초기부터 러시아군의 표적이 됐다. 키이우 최후 방어선인 ‘부차ㆍ이르핀 전선’ 진격을 위한 부대 주둔지이자 병참 기지로 이용하기 위해서다. 러시아군은 침공 닷새째인 2월 28일 도시에 진입했고, 3월 1일부터는 전투기를 동원해 포탄을 숱하게 날렸다.
도시는 완전히 폐허가 됐다. 중심 도로를 따라 3.5㎞가량 늘어선 고층 건물들은 모조리 파괴돼 뼈대만 남았다. 미사일이 떨어져 두 동강 난 건물도 있었다. 주민들은 러시아군 포격으로 아파트 4개 동이 붕괴됐다고 전했다. 상점들은 모두 약탈당했고, 일부 주택은 러시아군 막사로 이용됐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현지 취재진을 인용해 “보로댠카에서 목격한 상흔은 충격적”이라고까지 표현했다.
극도로 파괴된 이곳에선 희생자가 어디에 묻혀 있는지 파악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게오르기 예르코 시장대행은 “지하실이나 아파트로 대피했던 주민 수십 명이 실종됐다”며 “추정치이지만 사망자가 200명을 넘을 것 같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검찰은 각 도시의 피해 현황을 확인하며 러시아의 전쟁범죄 증거들을 수집하고 있다. 이날 기준 수사 목록에 오른 사건은 4,684건에 달한다. 이리나 베네딕토바 검찰총장은 기자회견에서 “전쟁범죄 의심 사건이 매일 수백 건씩 늘고 있다”며 “우리 땅에서 잔학 행위를 한 비인간적인 자들을 기필코 처벌할 것”이라고 말했다. 부차에선 어린이 요양병원 내 지하 고문실도 발견됐다. 어린이를 포함해 시신 6구에는 고문 흔적이 뚜렷했다.
러시아군이 점령한 다른 도시들, 특히 러시아군이 병력을 집중하고 있는 동부 지역에서도 비슷한 참상이 발생했을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동남부 마리우폴은 이미 90% 이상 파괴돼 “사람이 살 수 없는 곳”(바딤 보이첸코 마리우폴 시장)이 됐다. 최근 러시아군은 친(親)러시아 반군이 장악한 동부 도네츠크, 루한스크와 맞닿아 있는 소도시 이지움도 점령했다. 이곳 또한 “마리우폴의 미니어처”라 할 정도로 파괴가 극심한 것으로 전해졌다.
군사전문가들은 다음 진격 목표는 이지움에서 남쪽으로 불과 51㎞ 떨어진 슬로비얀스크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 싱크탱크 전쟁연구소는 “슬로비얀스크를 장악하면 동북부와 동남부 군대를 연결할 수 있다”며 “향후 우크라이나 전쟁의 핵심 전장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진단했다. 제2의 부차, 제2의 마리우폴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이미 4일 밤 대규모 공습을 당하면서 공포가 커지고 있다.
서방은 우크라이나에 추가로 무기를 공급하는 등 지원을 강화하고 있지만, 전쟁 장기화가 불가피한 상황에서 우크라이나 홀로 참상을 막기에는 역부족일 전망이다. 마크 밀리 미국 합참의장은 미 하원 군사위원회에 출석해 “이번 전쟁은 최소 몇 년간 계속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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