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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결 처형, 무작위 살인, 집단 학살' 정황 속속...러군, 우크라에서 무슨 짓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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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결 처형, 무작위 살인, 집단 학살' 정황 속속...러군, 우크라에서 무슨 짓 했나

입력
2022.04.04 19:23
수정
2022.04.04 19:46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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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차 등 우크라 수복 지역서 시신 410구 발견
집단 매장 위해 파낸 14m 구덩이 위성사진에도 포착
체첸·시리아처럼... “집단학살은 러군 전형적 수법”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외곽 소도시 부차에서 3일 우크라이나 군인들이 파괴된 러시아군 탱크 잔해가 널려 있는 거리를 지나가고 있다. 부차=AP 연합뉴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외곽 소도시 부차에서 3일 우크라이나 군인들이 파괴된 러시아군 탱크 잔해가 널려 있는 거리를 지나가고 있다. 부차=AP 연합뉴스

“네, 몸의 문신을 보니 남편이 맞아요.”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서쪽 모티진 마을에서 주민 조야 메르친스카야가 배수구를 들여다보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곳엔 한 남성이 앉은 자세로 고꾸라진 채 숨져 있었다. 옷이 벗겨진 상반신은 반쯤 물에 잠겼고, 목에는 검은 끈이 감겨 있었다. “반지를 빼 가진 않았군요.” 망연자실한 아내는 애써 울음을 삼켰다.

배수구에서 200m가량 떨어진 구덩이에선 올하 수켄코 시장과 그 일가족이 발견됐다. 눈이 가려진 시신들은 집단 처형당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현지 보안 담당자는 “러시아에 협력하라는 요구를 거부해 살해당한 것”이라고 3일(현지시간) 영국 시사주간 이코노미스트에 말했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서쪽 모티진 마을의 한 배수구에서 3일 발견된 주민 시신. AP 연합뉴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서쪽 모티진 마을의 한 배수구에서 3일 발견된 주민 시신. AP 연합뉴스


러시아군이 최근 한 달간 점령했던 키이우 외곽 도시들은 시신이 나뒹구는 참혹한 지옥으로 변했다. 무차별 폭격에 사망한 주민 시신도 많았지만, 즉결 처형, 무작위 살인, 집단 학살 등 살인 자체에 목적을 둔 잔학 행위 증거들도 숱하게 발견됐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수복한 도시들에서 이날까지 민간인 시신 410구를 수습, 이 중 140구는 검사ㆍ수사관 및 법의학 전문가의 조사를 받았다고 밝혔다. 이리나 베네딕토바 우크라이나 검찰총장은 “이 지옥을 만든 짐승 같은 자들을 처벌하기 위해 전쟁범죄를 낱낱이 기록할 것”이라며 분노했다.

키이우 북서쪽 도시 부차에선 특이하게도 팔에 흰 천을 두른 시신들이 많았다. 생존 주민들에 따르면 민간인이라는 표식이다. 하지만 러시아군은 오히려 이 천을 결박하는 데 이용했다. 로이터통신은 “양손이 묶인 채 머리에 총탄이 박힌 시신들이 많이 발견됐는데 일부는 얼굴에 화상 자국도 있었다”며 “근거리에서 총을 맞았다는 의미”라고 짚었다. 부차 시당국은 러시아군 퇴각 이후에만 시신 300구가 넘게 확인됐고, 이 중 50구는 처형의 결과로 추정했다.

러시아군이 주민 대피로를 개설한 뒤 학살했다는 증언도 쏟아졌다. 한 목격자는 “러시아 병사들은 남자들이 대피로를 이용하지 못하게 막았고, 들판을 가로질러 탈출하는 주민들을 향해 닥치는 대로 총을 쐈다”며 “탱크가 도로에 널린 시신 위로 지나가면서 동물 가죽 깔개처럼 짓이기기도 했다”고 영국 가디언에 말했다.

성 앤드루 교회 앞마당은 거대한 무덤이 됐다. 시신 집단 매장을 위해 파낸 14m 길이 구덩이는 미국 민간위성업체 맥사가 촬영한 위성사진에서도 확인된다. 미국 CNN방송은 “구덩이 속에는 시신들이 겹겹이 포개져 있었고, 검은 시신 가방 밖으로 손발이 비어져 나와 있었다”며 “매장지 흔적을 보면 그 아래 더 많은 시신이 묻혔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고 전했다.

3일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외곽 도시 부차의 한 도로에 손이 뒤로 묶인 채 숨진 남성의 시신이 놓여 있다. 부차=AP 뉴시스

3일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외곽 도시 부차의 한 도로에 손이 뒤로 묶인 채 숨진 남성의 시신이 놓여 있다. 부차=AP 뉴시스


전 세계는 러시아군의 잔혹함에 경악했다. 가디언은 “러시아가 체첸 및 시리아 전쟁에서 저지른 만행과 동일하다”며 “전황이 악화될 때마다 상대군 사기를 꺾기 위해 반복적으로 사용된 전형적인 수법”이라고 지적했다. 러시아는 1999년 2차 체첸 전쟁 당시 수도 그로즈니 조기 장악에 실패하자 민간인 수천 명을 학살했고, 2016년 알 아사드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개입한 시리아 내전에선 저항군의 거점이던 알레포 주거 지역을 화학무기까지 동원해 섬멸했다. 영국 국방ㆍ안보 싱크탱크 왕립합동군사연구소 잭 와틀링 수석연구원은 “이번 학살이 잔혹 행위의 결과라고 말하는 건 틀렸다”며 “사전에 준비된 계획”이라고 진단했다.

3일 우크라이나 키이우 인근 부차에서 숨진 사람들의 시신이 집단 매장되고 있다. 부차=AP뉴시스

3일 우크라이나 키이우 인근 부차에서 숨진 사람들의 시신이 집단 매장되고 있다. 부차=AP뉴시스


앞선 전쟁을 수행하면서 러시아군 내부에 ‘폭력 숭배’가 깊이 뿌리내렸다는 분석도 나온다. 병사들이 아무 죄책감 없이 학살을 자행할 수 있었던 이유다. 사회인류학자인 엘레나 라체바 영국 옥스퍼드대 연구원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 크렘린궁은 미디어를 통해 참전 용사들을 롤모델화하고 ‘침략 숭배’를 의도적으로 조장했다”며 “목표는 무의미한 군사 작전을 합법화하는 것”이라고 짚었다.

김표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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