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커상 후보 오른 '저주 토끼'
새 표지 입고 재출간
영국의 부커상은 노벨문학상, 공쿠르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로 꼽힌다. 2016년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가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에서 수상하며 국내에도 널리 알려졌다. 2018년에 한강 작가의 ‘흰’이 같은 부문 최종 후보에 또 한번 올랐고, 2019년에는 황석영 작가의 ‘해질 무렵’이 1차 후보에 오른 바 있다.
올해는 부커상 1차 후보에 한국 작가 두 명의 작품이 이름을 올렸다. 영국 부커재단은 지난달 10일(현지시각) 박상영 작가의 ‘대도시의 사랑법’과 정보라 작가의 ‘저주 토끼’를 포함한 13편의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1차 후보를 발표했다. 최종 수상과는 별개로 후보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영미권 독자들의 주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후보작에 대한 국내 관심도 덩달아 높아졌다.
그중에서도 특히 정보라 작가의 ‘저주 토끼’는 부커상을 통해 재발견된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17년 출간 당시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이번 부커상 후보 지명을 통해 국내 독자들의 관심도 높아졌다. 이에 맞춰 출판사 아작이 새 표지를 입힌 리커버 버전을 최근 새로 내놓았다.
책에는 표제작 ‘저주 토끼’를 포함해 총 10편의 단편 소설이 실려 있다. “환상적이고 초현실적인 요소를 활용해 현대의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참혹한 공포와 잔혹함을 이야기한다”는 부커 재단의 소개에서도 알 수 있듯, 각각의 이야기들은 저마다 섬뜩하면서도 기묘한 방식으로 인간의 탐욕을 비틀어 보여준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주체는 인간이다. 이 때문에 이것의 공허를 응시할 수 있는 것은 ‘인간 아닌 존재’일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표제작인 ‘저주 토끼’에서 억울한 모함을 당해 모든 것을 잃은 한 가족의 복수를 대신하는 것은 ‘토끼’다. 이 토끼는 부정한 방식으로 남의 것을 빼앗은 남자의 집안에 들어가, 문서를, 정신을, 뼈를, 결국에는 그 집안의 모든 것을 갉아먹는 방식으로 복수를 행한다. 마찬가지로 단편 ‘덫’에서 덫에 걸린 여우를 발견하고도 풀어주기는커녕 더욱 악랄하게 여우를 가둬놓고 착취하던 남자는, 결국 여우를 착취했던 방식 그대로 자신이 일군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작가의 상상력이 특히 돋보이는 소재는 신체, 그중에서도 여성의 신체다. 단편 ‘머리’는 어느 날 변기 속에서 자신의 배설물과 오물로 만들어진 피조물이 자신을 ‘어머니’라고 불러오는 것을 목격하게 되는 여성의 이야기다. 그런가 하면 단편 ‘몸하다’는 호르몬 이상으로 오랫동안 피임약을 복용하던 여성이 ‘아버지 없는’ 임신을 하게 되면서 겪는 일을 그린다. ‘무정란’ 상태인 태아를 ‘유정란’으로 만들기 위해 여성은 아버지가 되어 줄 남성을 찾아 나서지만 결국 실패하고 만다.
이들은 남성과의 결합 없이 자기 자신의 신체를 통해서만 어머니가 된다. 배설물이거나, 거대한 핏덩어리거나, 혹은 지하실의 희끄무레한 그림자거나 로봇이거나. 이처럼 ‘인간 아닌 존재’들의 어머니가 되는 여성들을 통해 작가는 기존의 모성 서사와 가부장제를 완전히 전복시킨다.
책은 기본적으로 비정한 세상에 대한 비릿한 복수다. 그러나 복수가 끝난 자리에 남는 것은 통쾌함 대신 쓸쓸함이다. 작가는 후기에서 이 책은 ‘쓸쓸한 이야기들의 모음’이라고 말한다. “원래 세상은 쓸쓸한 곳이고 모든 존재는 혼자이며 사필귀정이나 권선징악 혹은 복수는 경우에 따라 반드시 필요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필요한 일을 완수한 뒤에도 세상은 여전히 쓸쓸하고 인간은 여전히 외롭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책을 번역한 안톤 허는 2018년 와우북페스티벌에서 우연히 이 책을 만났다. 첫 장을 읽자마자 매혹적인 이야기에 사로잡혔고 마침 그 자리에 있던 정보라 작가와 출판사에 번역을 제안하게 된다. 그로부터 4년 뒤 ‘저주 토끼’는 부커상 후보에 지명됐고 먼 길을 돌아 더 많은 독자와 만날 기회가 생겼다. 세상은 쓸쓸하고 모든 존재는 혼자일지 모르지만, 그런 멋진 우연과 발견이 있기에 인간도 책도 조금 덜 쓸쓸한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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