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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아 보고, 바라보고... 한국 디자인 의자의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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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아 보고, 바라보고... 한국 디자인 의자의 매력

입력
2022.04.01 04:30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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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훈 작가의 '태초의 잔상' 시리즈 중 07-244. 앉은 이가 돌을 바라보며 명상을 하도록 의도했다. 최병훈 작가 제공

최병훈 작가의 '태초의 잔상' 시리즈 중 07-244. 앉은 이가 돌을 바라보며 명상을 하도록 의도했다. 최병훈 작가 제공

노인은 흔들의자에 앉아 뜨개질을 하다 꾸벅꾸벅 존다. 왕좌는 대개 크고 휘황찬란하며, 집에서 쉴 때면 소파에 옆으로 누운 자세로 리모컨을 돌린다. 드라마, 영화에 등장하는 의자는 단순한 가구가 아니다. 인물의 성격과 상황을 설명해주는 또 다른 조연이다. 실생활에서도 그렇다.

의자는 가구의 꽃, 가구의 왕. 사람의 자세는 의자에 따라 달라진다. 어떤 의자는 공간을 압도하며 주인공이 되고, 어떤 의자는 배경이 되기를 자처한다. 빈 의자는 때로 조각이 된다. 사람과 공간의 아우라를 만드는 오묘한 기물, 그게 의자다. '디자인 가구'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은 요즘, 바실리 의자, LC3, 바르셀로나 의자만 있는 게 아니다. 세계가 주목한 한국 가구 디자이너들의 디자인 의자를 소개한다.

'자리'이자 '조각'인 의자

덕수궁 돌담길에 놓여 있는 최병훈 작가의 의자. 길다란 돌이 움직이지 않도록 작은 돌을 괴어 놓은 듯한 모습이다. 최병훈 작가 제공

덕수궁 돌담길에 놓여 있는 최병훈 작가의 의자. 길다란 돌이 움직이지 않도록 작은 돌을 괴어 놓은 듯한 모습이다. 최병훈 작가 제공

돌을 치우면 뒤로 넘어갈 것 같은 의자에서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최병훈(69) 작가는 '태초의 잔상' 시리즈 중 하나인 이 의자(07-244)를 "명상용 의자이자 오브제"라고 설명한다. 그는 "돌의 무게로 물리적인 구조의 문제를 해결하면서 의자에 앉은 사람의 시선이 돌로 향하게 했다"며 "의자에서 자기 내면을 성찰하고 사유하기를 바랐다"고 말했다.

그는 국내에서 '아트 퍼니처'라는 용어를 처음 쓴 1세대 가구 디자이너다. 1990년 홍익대 목조형가구학과 교수로 부임해 퇴임할 때까지 아트 퍼니처 과목을 가르쳤다. "가구를 사용하지 않는 시간에도 그 공간에서 미적 만족감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게 그의 디자인 철학. 덕수궁 돌담길에 놓여 있는 돌로 만든 벤치가 최 교수의 작품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해 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휴스턴 미술관, 독일 비트라 디자인 뮤지엄 등에서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박종선 작가의 의자. 간결하고 담백한 선으로 이뤄져 군더더기가 없다. 박종선 작가 제공

박종선 작가의 의자. 간결하고 담백한 선으로 이뤄져 군더더기가 없다. 박종선 작가 제공

간결하고, 담백하다. 박종선(52) 작가의 디자인을 설명하는 단어다. 박 작가는 조선 시대 목가구와 미국 셰이커 교도의 가구에서 영향을 받아 간소하면서도 기능에 초점을 맞춘 가구를 만들어 왔다. 그가 디자인한 의자들의 좌판, 등받이가 파인 곳 없이 수평을 유지하는 것도 "교실 의자처럼 딱딱한, 적당히 불편한 의자여야 오래 앉아 있을 수 있다"고 여겨서다. 한국에서는 영화 '기생충'의 박 사장네 집 테이블과 의자로 이름이 알려졌지만, 2009년 첫 해외 페어 이후 줄곧 좋은 성과를 거두며 세계가 먼저 알아본 가구 디자이너다.

그에게 좋은 가구 디자인의 핵심은 '보편성'이다. "의자를 만들 때 머릿속으로 여러 사람을 앉혀 보거든요. 대통령, 아이, 노인, 흑인... 인종, 나이, 시대와 상관없는 보편적인 디자인, 쓰는 사람을 가리지 않는 디자인이 좋은 디자인이라고 생각하죠."

영화 '기생충' 속 박 사장네 집 테이블과 의자. 박종선 작가가 디자인한 작품이다.

영화 '기생충' 속 박 사장네 집 테이블과 의자. 박종선 작가가 디자인한 작품이다.


좌식, 한옥, 자연스러운 곡선... 한국의 디자인 정체성 담는 의자들

배세화 작가의 '스팀' 연작 중 20번. 아이가 부모와 벤치에 나란히 앉아 대화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만들었다. 배세화 작가의 작품은 현재 리움미술관에서 전시 중으로, 직접 앉아 보고 감상할 수 있다. 배세화 작가 제공

배세화 작가의 '스팀' 연작 중 20번. 아이가 부모와 벤치에 나란히 앉아 대화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만들었다. 배세화 작가의 작품은 현재 리움미술관에서 전시 중으로, 직접 앉아 보고 감상할 수 있다. 배세화 작가 제공

배세화(41) 작가는 의자 중 주로 벤치를 통해 고요하고 정적인 한국적인 정서를 표현한다. 그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 한국 전통의 미라고 생각한다"며 "의자를 만들 때도, 직선을 먼저 놓고 스팀 밴딩(나무를 쪄서 모양을 내는 작업)을 통해 최대한 절제된 곡선을 만들고자 한다"고 설명했다. 대표작인 '스팀' 시리즈의 10번 단위 작품들은 인간의 생애를 의자에 녹였다. 불룩 나온 배의 형상으로 태아를 표현하거나 아이가 부모와 벤치에 나란히 앉아 대화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만들었다.

레진을 재료로 만든 박원민 작가의 '헤이즈' 시리즈 의자. 박원민 작가 제공

레진을 재료로 만든 박원민 작가의 '헤이즈' 시리즈 의자. 박원민 작가 제공

오랜 기간 좌식 문화권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한국의 가구 디자인은 서구에 비해 출발부터 불리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하늘 아래 새로울 게 없는 시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야 하는 창작자에게는 이런 문화적 차이가 경쟁력이 되는 법이다. 박원민(39) 작가는 "디자인 콘셉트는 미술사적 맥락이나 의미에 초점을 두더라도, 그 안에서의 표현은 한국적으로 나타날 때가 많은 것 같다"고 설명했다. '헤이즈' 시리즈에서 보여준 한복과 유사한 색감이나 최근 선보인 '플레인 컷' 시리즈의 곡선이 그 예다. 그는 "플레인 컷의 경우 돌을 자른 단면을 이용해 의자를 만들었다"며 "이때 단면의 둘레가 보여주는 곡선처럼 인공적이지 않은, 무심하고 디자인한 것 같지 않은 디자인이 한국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국의 좌식 문화를 기반으로 하지훈 작가가 만든 의자, '자리'. 의자를 이어 붙이면 연속적으로 솟은 산등성처럼 보이도록 디자인했다. 하지훈 작가 제공

한국의 좌식 문화를 기반으로 하지훈 작가가 만든 의자, '자리'. 의자를 이어 붙이면 연속적으로 솟은 산등성처럼 보이도록 디자인했다. 하지훈 작가 제공


하지훈 작가의 '호족 의자'. 호랑이 발의 형태를 가진 호족 소반의 다리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했다. 하지훈 작가 제공

하지훈 작가의 '호족 의자'. 호랑이 발의 형태를 가진 호족 소반의 다리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했다. 하지훈 작가 제공

하지훈(49) 작가는 작품에 한국의 좌식 문화와 전통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인다. 영국 빅토리아 알버트 박물관에서 영구 소장한 '자리'는 등나무를 엮어 만든 돗자리 위에 등받이를 만든 의자다. 호족반, 나주반 같은 전통 소반에서 영감을 얻은 의자를 내놓기도 한다. 창덕궁 가정당에 놓인 그가 디자인한 '나주 의자'는 천장이 낮은 한옥의 특성을 고려해 비례를 조정했다. 일반 의자보다 좌판이 8㎝ 낮다.

이런 작업의 바탕에는 과거의 문화 유산을 창조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그는 "의자는 서구의 종목이기 때문에 더욱더 이와 차별화되는, 우리의 정체성이 있는 의자를 고민해야 한다는 시대적 사명감이 있다"며 "과거에서부터 미래가 나오기 때문에 몇 백 년 뒤 전통이 될, 지금 우리의 미감을 반영한 한국의 의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송옥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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