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 경창산업 노조위원장 “회사 위기에 노조가 임금동결 제안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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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 경창산업 노조위원장 “회사 위기에 노조가 임금동결 제안했죠”

입력
2022.04.09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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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입사 42년차 경창산업맨, 2009년 노조위원장
2018년 회사 위기 때 조합원들 설득해 2년 임금동결
"후배들 제대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기반 다졌다 자부"


김성호 경창산업노조위원장은 "지게작대기를 휘둘렀을지언정 마음으로는 늘 자식의 안위를 기원해주신 아버지, 기름때가 꼬질꼬질한 장갑을 끼고 있는 직원의 손을 덥석 잡아주시던 명예회장님, 늘 위원장을 믿고 따라준 후배들, 조합원들의 의견에 귀 기울여준 경영진 모두 저에게는 든든한 언덕이었다"면서 "한분 한분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고 노동위원장으로, 경창 구성원으로서 제게 주어진 역할에 언제까지고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김민규 기자


"자네 어디 갔다 왔는가?"

회사로 돌아올 생각은 없었다. 제대 후 새로운 회사를 찾을 생각이었다. 말년 휴가를 나왔다가 우연히 마주친 공장장의 설득에 넘어가 군복을 벗자마자 다니던 회사로 나갔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어쩌다 출근'이었다. 며칠 뒤, 생산라인을 돌아보고 있던 창업주가 군에서 돌아온 젊은 직원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악수가 아니었다. 일하고 있는 그의 손을 불쑥 감싸 쥔 것이었다. 장갑에는 기름때가 끼어 있었지만, 창업주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손기창(100) 경창산업(주) 명예회장은 어느 날 문득 보이지 않다가 다시 나타난 직원을 그렇게 반갑게 환대했다. 지금은 현대차의 1차 협력사로 자동차 구동부품 제조 분야에서 선두주자의 입지를 굳힌 덕에 1,200명이 넘는 직원이 일하고 있지만, 김 위원장이 제대하던 1987년만 해도 직원수가 150명 남짓이었다. 그렇긴 해도 몇 년이나 사라졌다 나타난 젊은 직원을 단번에 알아본 것은 직원에 대한 애정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거였다. 손 명예회장의 진심 어린 환대를 받았던 김성호(57) 경창산업노조연합위원장은 "그냥 지나칠 줄 알고 고개를 푹 숙이고 기계를 만지고 있었다"면서 "그렇게 반가워하실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회상했다.

"제가 '군대에 갔다 왔습니다' 하니까 '그래, 고생했네, 이 사람아!' 하면서 어깨를 툭툭 두드리시더라고요. 그때 가슴에서 뭉클한 것이 올라왔습니다. 그렇게 경창의 가족이 되었죠. 그게 벌써 40년이 훌쩍 넘은 일이네요."

고등학교에 자퇴서 내고 대구행

정에 목말랐던 시절이었다. 김 위원장의 10대와 20대는 한 마디로 '독기'로 살아낸 시절이었다. 그는 경북 의성에서 8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그리 넉넉하지 않은 가정 형편에 고향에서 인문계 고등학교를 다니다 자퇴서를 던지고 대구로 나왔다. 아버지는 반항기 다분한 아들을 타이르다 분을 못 이기고 지게 작대기를 꼬나들었다.

"이 집에서 한 발짝이라도 나가면 너는 내 자식도 아니다!"

스스로의 의지로 걸어 나왔지만 쫓겨난 것보다 더 험한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생각을 곱씹으면서 대구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공업계 고등학교에 입학해 밤에는 공부하고 낮에는 생산 현장에서 일했다. 시급이 270원, 한달 월급이 7만 원 남짓이었다. 그 돈으로 월세와 학비, 생활비를 충당해야 했다. 늘 돈이 부족했다. 1년 사이에 이사를 여섯 번이나 한 적도 있었다. 가난이 곧 설움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무엇보다 외로웠다. 세상은 혼자서 개척하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 언젠가 생길 가족들에게 설움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각오로 하루하루를 버틴 세월이었다. 그 외로움과 두려움이 독기가 된 거였다.

정말 열심히 일했다. 입사 4개월 만에 경창산업과 합작한 일본계 회사로 연수를 갔다. 100여 명의 직원 중에서 선발된 3명에 이름을 올린 것이었다. 그만큼 회사에서 그의 성실성과 열정을 인정한 셈이었다. 군대를 다녀와 재입사한 뒤에는 물을 만난 고기처럼 신나게 일했다. 1987년 이후 개선제안제도가 생겼는데, 개선 제안에 적극 참여해 1년에 1번 주는 상을 2년 연속으로 받기도 했다. 그 덕에 일본인 컨설턴트가 이끄는 생산성 배가 운동 팀에 합류할 수 있었다. 김 위원장은 "고향에서 인문계 학교를 다닐 때는 따분하고 지겹기만 했는데, 공업계열은 학교도 직장 일도 재미있었다"면서 "한번 내 일이다 싶으면 푹 빠져서 파고드는 성격도 회사에서 빠른 시간 안에 인정을 받는데 한몫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의욕 없는 노조위원장에 너무 실망

노동조합에 관심을 가진 것도 이런 열정과 일에 대한 애착에서 비롯됐다. 현장 책임자로 있으면서 협력 업체에서 자재가 원활하게 들어오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야간근무를 하는 날이 잦았다. 안 해도 될 작업을 한다는 생각에 노동조합을 찾아갔다. 현장의 애로 사랑을 기민하게 파악해서 경영진에게 전달하고, 합리적인 해결책을 찾아가는 것이 노조의 역할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노조 간부에게 이렇게 하소연했다.

"안 해도 될 야근을 하는 데다, 야근으로 지출된 비용 때문에 연말 성과금도 낮아질 게 뻔합니다. 노조나 회사 모두에게 비효율적인 상황입니다. 경영진에 강력하게 개선을 촉구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김 위원장이 만난 노조 관계자는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네가 나중에 위원장 하면 그렇게 해라."

그때 욱, 하는 것이 올라왔다. 노조 위원장이 아니라 회사 선배의 입장에서라도 발 벗고 나서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까닭이었다.

"전에 있는 위원장은 있는 둥 마는 둥이었는데, 김 위원장은 왜 이렇게 별스럽소?"

그런 마인드 때문이었을까, 2009년 7월에 노조위원장이 된 이후 경영진과 마찰을 빚었다. 경영진은 "지금도 괜찮다"는 입장이었고, 김 위원장은 바꿀 부분은 바꿔서 노조와 회사가 성장하도록 하는 것이 위원장의 책무라는 생각이었다.

"노동자의 사기 진작에 가장 신경을 썼습니다. 근로자의 마인드에 따라서 생산성이 많게는 10%까지 차이가 납니다. 사기 진작을 위해 직책 수당을 높여달라는 요구를 줄기차게 했죠."

3년 만에 요구를 관철시켰다. 처음엔 볼멘소리를 하던 경영진은 사기 진작 효과를 톡톡히 보고 김 위원장이 이끄는 조합을 이해하고 인정해주기 시작했다. 싸우면서 친해지고, 격렬하게 소통하면서 공동의 성과를 이뤄낸 셈이었다.

김 위원장은 이 대목에서 큰형님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그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노동계 리더로서의 멧집과 강단을 큰형님에게 배웠다"고 말했다. 어린 시절에 친구들과 싸우고 돌아올 때면 큰형은 그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보고 덩치가 작거나 약한 아이면 크게 혼을 냈다. 김 위원장보다 키와 체격이 큰 친구와 싸운 날은 그냥 넘어갔다. 약한 친구들에게는 져주는 편이었고, 강한 상대에게는 악착같이 달라붙었다. 그러다 보니 나름의 근성이 생겼다는 것. 그는 "큰형님은 나의 명예 노조위원장"이라면서 너털웃음을 얻었다.

"위원장님, 우리 망합니까?"

노조가 경영진과 흉금을 터놓고 대화할 정도로 친밀해진 계기는 또 있었다. 2018년 경창이 크게 흔들렸다. 현대자동차가 연간 1,000만 대를 생산할 것이라는 예측을 하고 선제적으로 설비를 늘였는데, 이것이 예상을 빗나가고 말았다. 800만 대를 생산하던 현대자동차가 생산 대수를 700만 대로 줄였다.

"위원장님, 우리 망합니까?"

경창이 무너질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다른 노조위원장들 마찬가지였다. 직원들 사이에서도 "회사가 곧 부도난다"는 이야기가 오갔다.

"회사가 있어야 노동조합도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회사 망하면 경영진 바뀌면 그만'이라는 목소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경창만의 문화와 정체성은 사라지겠죠. 어떻게든 경창이라는 문화적 경제적 공동체가 살아남는데 나름의 역할을 하고 싶었습니다."

조합원들을 설득하고 설득해서 2년 동안 임금을 동결했다. 회사에서 나서기 전에 김 위원장이 먼저 제안한 일이었다. 이어 사무직 근로자 구조조정, 생산직 희망퇴직도 진행했다.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금융계에서 노동조합이 회사 살리기에 발벗고 나서는 모습을 보고 조금씩 기조가 변하기 시작했다. 경영진과 노조 모두 회사 살리기에 진력을 다했다.

"왜 이렇게 열심히 합니까?"

간혹 그렇게 물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그때마다 이렇게 대답했다.

"직원들을 위해서 발 벗고 나서는 것입니다."

위기 상황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손일호 회장이 김 위원장에게 말했다.

"고맙네. 회사 살리는데 노조가 이렇게까지 발 벗고 나서줄 줄은 몰랐네."

그날 김 위원장은 손 회장의 사의에 기름때 낀 장갑도 개의치 않고 손을 덥석 잡던 손 명예회장을 떠올렸다. 크게 보자면 노사화합을 통한 위기 극복이지만 좁게 보자면 갓 제대한 직원에 대한 창업주의 환대와 애정이 회사를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구한 셈이었다. 김 위원장은 "어쨌거나 경창에서 잔뼈가 굵었다"면서 "회사가 잘되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고, 그래서 먼저 나서서 힘을 보태겠다고 했다"고 고백했다.

"명예회장님의 영향이 제일 크겠지만, 경창에는 가족적인 분위기를 넘어 그냥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직원이 많습니다. 한솥밥 먹는 가족으로서 힘을 모아 위기를 극복했다는 뿌듯함은 노조뿐 아니라 경창 전체의 자부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노조위원장이 그런 말 할 줄은..."

김 위원장는 올해로 42년차 근로자다. 경창산업에서 강산이 네 번 변하는 세월을 살아낸 셈이다. 그 사이 마음의 독기가 모두 사그라들었다. 세상이 내게서 등을 돌리고 있다는 생각 혹은 가진 자들에 대한 적의가 어느 사이에 사라졌다. 그는 "그런 증오가 왜 생겼는지 콕 집어 말하기도 힘들지만, 어떻게 사라졌는지 물으면 그 역시 뾰족한 답을 찾기 힘들다"면서 "어찌 되었든 좋은 결론에 닿은 느낌이어서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경창만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노조에 대한 그의 생각도 과거와 사뭇 달라졌다. 김 위원장은 "회사가 잘못하고 있다면 싸워야겠지만 투쟁 일변도의 활동은 옛날이야기"라고 못 박았다. 노조위원장의 역할에 관해서도 노조뿐 아니라 회사 발전에 기여하는 위원장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최근 그런 생각을 실천에 옮긴 사례가 있었다. 모 대기업이 협력 업체 선정을 위해 경창산업을 방문했을 때 그 기업의 전무에게 "조합의 수장으로서 절대 후회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얼마 전 그 대기업 전무는 "노조위원장이 나와서 그런 말을 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잘할 것이라 기대는 했지만, 이 정도 일줄은 또 몰랐다"면서 "노사관계에 대한 책을 쓰는데 김 위원장에게 자문을 구하고 싶다"고 연락을 해왔다. 그와는 지금도 간간이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가 됐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는데, 제가 경창에 있을 동안 세상이 4번이나 변한 셈입니다. 그러나 저와 노조, 경창은 변한 게 아니라 성장했다고 생각합니다. 다투기도 하고, 손을 잡기도 하면서 이 모든 성취를 함께해냈다는 사실이 너무 뿌듯합니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고 하는데, 저 개인적으로는 지금까지 다 좋았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찍은 유일한 가족사진

40여 년 동안 숱한 일들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은 지게 작대기를 휘두르며 절연을 선언했던 아버지와의 화해였다. 2013년, 부친이 고향 의성을 떠나 대구로 왔다. 암이 발병해 경북대병원에 입원한 것이었다. 폐암 2기 진단을 받았다. 입원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서울에서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석탑산업훈장 수상이었다.

"내가 이런 걸 또 보겠나?"

소식을 접한 아버지가 시상식 하는 날 서울로 가겠다고 나섰다. 5월23일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부상은 30만원, 아버지는 아들에게 "그 30만원 가지고 술과 음식을 장만해서 주말에 의성 경로당에서 잔치를 열어라"고 당부했다. 주중에 음식을 만들어 주말에 의성 경로당에 들고갔다. 그렇게 고향사람들과 수상의 기쁨을 나누었다.

아버지는 그해 11월에 별세했다. 김 위원장은 "돌아가시고 나니까 아들의 수상을 기뻐하면서 굳이 서울까지 따라오시던 모습이 적잖게 위로가 되더라"고 고백했다. 시상식에서 찍은 사진은 가장 소중한 유품이 됐다. 어린시절부터 그 나이에 이르기까지 아버지와 함께 찍은 가족사진이 단 한 장도 없었다. 김 위원장과 그의 부친이 동시에 나온 가족사진은 그날 시상식에서 찍은 사진이 유일하다.


2013년 5월23일, 김성호(왼쪽) 경창산업노조위원장이 석탑산업훈장 수상한 후 아버지와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부친과 함께 촬영한 유일한 '가족사진'이다. 김성호 제공


"어느 날 돌아보니 세상 저 혼자 살았던 게 아니더군요. 지게작대기를 휘둘렀을지언정 마음으로는 늘 자식의 안위를 기원해주신 아버지, 기름때가 꼬질꼬질한 장갑을 끼고 있는 직원의 손을 덥석 잡아주시던 명예회장님, 늘 위원장을 믿고 따라준 후배들, 조합원들의 의견에 귀 기울여준 경영진 모두 저에게는 든든한 언덕이었습니다. 모두 고마운 분들입니다. 아버지와 함께 가족사진을 찍을 때의 그 마음으로 한분 한분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고 노동위원장으로, 경창 구성원으로서 제게 주어진 역할에 언제까지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이야기도 남겼다. 김 위원장은 "우리 세대는 무(無)에서 출발해 후배들이 제대로 노동조합 활동을 할 수 있도록 기반을 다진 세월이었다"면서 "개인적으로도 임기 동안 약속한 규모의 조합비를 갖추는 등 공약을 모두 이루어낸 만큼 앞으로 누가 리더가 되더라도 든든한 기반 위에서 경창산업의 조합원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김광원 기자 (jang750107@hankookilbo.com)
박은솔 대구한국일보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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