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개막한 국립창극단 '리어'
① 노자 '물의 철학'으로 새로 보기
② 셰익스피어 극에서 우리말의 맛
③ 무대 채운 20톤 물의 역동성
④ 탄탄한 소리꾼들 '귀 호강' 보장
국립창극단의 신작 '리어'가 이달 22일 개막했다. 극본 배삼식, 연출 정영두, 음악 한승석·정재일, 무대 이태섭 등 최고의 창작진이 모였다는 소식에 연초부터 기대작으로 꼽혔던 작품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국립창극단의 새 도전은 성공적이었다. 3시간가량의 공연이 재주 좋은 입담꾼을 만난 듯 지루함 없이 흘러갔다. 각본과 음악, 연출, 연기 등 어느 하나 삐걱이지 않은 덕이다. 무엇보다 셰익스피어 비극 '리어왕'의 수많은 변주들과는 다른, 창극 '리어'만의 뚜렷한 매력이 관객을 사로잡았다.
① 노자 '물의 철학'으로 새로 보기
셰익스피어와 노자의 만남, 이번 작품이 다른 '리어왕'과는 다른 결정적 요인이다. 공연은 시작부터 '인간과 세상의 이치가 곧 물의 물성(物性)과 같다'는 무려 2000년 전 노자의 철학이 극의 토대라는 점을 명확히 짚어준다. "리어여, 물이여." 어두운 무대 위로 전 배우들이 등장하며 반복해 노래하는 대목이다. 이후에도 물과 삶을 비교하듯 풀어가는 대사와 가사를 따라 서사를 이해하는 재미가 크다. '천지불인(天地不仁·세상은 어질지 않다)'이라는 노자의 말 속에서 탄생한 이 무대 위에서 비극은, 선악의 개념이 아니라 인간이 시간이란 물살을 거스르려고 하면서 갈등을 만들고 끝내 실패하는 과정으로 읽힌다. 그래서 권력욕을 놓지 못하는 리어도, 시기 질투에 휩싸인 그의 두 딸(거너릴·리건)도 그저 허무한 욕망에 매달려 다투는 안타까운 인간 중 하나로 표현된다.
② 셰익스피어 극에서 우리말의 맛
영국이 아닌 우리 고전극을 보는 듯한 친숙함도 이 작품의 큰 매력이다. 영어를 문학의 언어로 만들었다고 칭송받는 셰익스피어의 글을 단순히 각색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대본을 새롭게 쓰면서 우리말의 참맛을 살렸다. 다양한 물의 속성을 표현하는 노랫말에 "워리렁 출렁, 주르르르, 콸콸, 으르렁 철썩, 처리철철 버썩"과 같은 맛깔스러운 표현이 대표적이다. 2016년 그리스 비극인 '트로이의 여인들'의 창극 제작에도 참여한 배삼식 작가가 이번에도 입에 착 붙는 대사를 써냈다.
③ 무대 채운 20톤 물의 역동성
20톤의 물로 채워진 무대 디자인도 독특하다. 물의 철학을 기반으로 한 극본을 물리적으로도 구현한 것이다. 배우들은 방수 신발을 신고 얕은 물길을 걷고 그 위로 넘어지고 첨벙대면서, 제약이 큰 무대라는 공간에서 끌어낼 수 있는 최대치의 생동감과 역동성을 보여준다. 글로스터가 자신의 서자 애드먼드의 배신으로 눈을 잃은 후 지난일을 후회해 온몸으로 절규하는 장면에서 사방으로 튀고 흩어지는 물의 움직임이 감정을 배가시킨다. 극 후반부 수상전투 장면은 천둥과 뇌우를 표현하는 적절한 조명까지 어우러지면서 비장미와 비극성까지 극대화된다.
④ 탄탄한 소리꾼들 '귀 호강' 보장
국립창극단 배우 15명의 열연은 창극 '리어'를 완성시킨 마지막 퍼즐 조각이다. 서른 남짓한 배우들의 노역 캐스팅으로 화제가 됐던 김준수와 유태평양은 탄탄한 소리와 집중력 높은 연기로 리어와 글로스터 그 자체로 관객에게 다가왔다. 민은경은 전혀 다른 색깔인 코딜리어와 광대 역을 동시에 완벽히 소화했고, 코러스를 담당한 출연진까지 창극단에서 오랜 호흡을 맞춰 온 경험 덕분인지 누구 하나 부족함 없는 기량을 선보였다. 오랜 동료인 한승석(작창)과 정재일(작곡)이 내놓은 세련된 음악은 무대 안을 자연스럽게 채워, 판소리나 창극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도 다채로운 창(唱)을 즐기기 쉽게 했다.
창극 '리어'는 30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에서 공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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