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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레이먼드 카버가 남은 생 바친 '시'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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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레이먼드 카버가 남은 생 바친 '시'의 세계

입력
2022.03.25 04:30
수정
2022.03.25 16:10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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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먼드 카버 시집 '우리 모두'

레이먼드 카버.

레이먼드 카버.


소설가이면서 동시에 시인이기도 했던 작가들은 문학 역사에서 무척 많다. 소설 '날개'와 시 '오감도'라는 불세출의 작품을 남긴 이상이 그랬고, 알고 보면 시인 백석도 소설로 등단했다. 한강 소설가 역시 1993년 ‘서울의 겨울’이라는 시를 통해 데뷔했고,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라는 시집을 상재한 시인이다.

이외에도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작가들이 시와 소설 모두를 썼다. 그러나 대개는 그중 하나의 정체성으로만 기억되기 마련이다. 1980년대 이후 미국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모더니즘 문학을 이끈 레이먼드 카버 역시 그렇다. ‘대성당’ ‘우리가 사랑에 대해 말할 때 이야기하는 것’ 등을 통해 단편소설의 미학을 완성했다고 평가되는 카버도 실은 처음부터 시와 소설을 같이 썼고, 가장 먼저 출판한 책 역시 시집이었다.

특히 1983년부터 1988년 사망하기 전까지 생의 후반부에는 ‘불’(1983), ‘물이 다른 물과 합쳐지는 곳’(1985), ‘울트라 마린’(1986)까지 세 권의 시집을 냈고, 사후에 '폭포로 가는 새로운 길’(1989), ‘영웅담은 제발 그만’(1991) 두 권의 시집이 엮였을 만큼 왕성하게 시를 썼다. 이처럼 소설가일 뿐 아니라 시인이기도 했던 카버지만 지금까지 국내에 번역된 시집은 한 권도 없었다. 최근 출간된 ‘우리 모두’는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카버의 시집이자 다섯 권 분량의 시집을 한데 묶은 ‘완전판’이다.

'우리 모두' 레이먼드 카버 지음. 고영범 옮김. 문학동네 발행. 640쪽. 2만7,000원

'우리 모두' 레이먼드 카버 지음. 고영범 옮김. 문학동네 발행. 640쪽. 2만7,000원

카버는 죽기 1년 전 한 인터뷰에서 “시와 소설의 관계는 어떤 것이냐”는 질문에 “저는 소설과 시를 같은 방법으로 쓰고, 그 효과도 비슷하다고 생각한다"며 “단편소설과 시는 단편소설과 장편소설보다 가까운 관계”라고 말한다. 카버의 말처럼 이 시집은 카버의 단편소설을 사랑했던 독자들이라면 동의할 수 있을 만큼 ‘이야기’적이다.

“집은 밤새도록 뒤흔들리고 고함을 질러댔다./아침이 가까워져서야, 조용해졌다. 아이들은,/뭐라도 먹을 걸 찾아, 개판인 거실을 지나/개판인 부엌으로 간다./아버지가, 소파에서 잠들어 있다”는 구절로 시작하는 시 ‘동방에서, 빛이’(342쪽)는 크리스마스 아침, 술 취해 소파에서 잠든 아버지를 발견하는 아이들의 응시로부터 출발한다.

남편이 아내로부터 받은 선물 상자에서는 기다란 밧줄이 반쯤 빠져나와 있고, 아이들은 그걸 보며 “둘 다 나가서 목이나 매달라지” 하고 생각한다. 이윽고 아이들은 난장판을 뒤로한 채 시리얼을 들고 TV가 있는 방으로 향한다. 아이들은 “아버지가 자신이 살아 있다는 걸 알 수 있도록” TV의 볼륨을 높인다.

크리스마스 아침, 난장판이 된 집, 부부의 불화, 웃자란 아이들. 마치 카버의 여느 소설과도 같은 이야기가 짧은 시 한 편에 담겨 있다. 소설이 그랬듯 시 역시 카버의 실제 경험이 바탕이 된 만큼 그의 가족들과 친구가 나오고 찰스 부코스키,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작가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술, 결혼생활, 가족, 가난, 예술, 자연 등의 주제는 카버가 평생에 걸쳐 천착한 이야기의 원류이자 카버 자신의 삶 전부이기도 하다.

레이먼드 카버. 한국일보 자료사진

레이먼드 카버. 한국일보 자료사진

생의 순간들이 그렇듯 어떤 시들은 활달하고, 어떤 시들은 불우하고, 어떤 시들은 감동으로 흘러넘친다. 책에 실린 시 대부분이 카버가 말년에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쓴 만큼 회환과 통찰이 어우러진다.

"그날 그가 갔던 모든 곳에서 그는/자신의 과거 속을 걸었다. 쌓여 있는 기억들을/걷어차면서. 더 이상 그의 것이 아닌/창문들을 들여다보았다./노동과 가난, 돌아오는 것이 적었던 시절. 그 시절 그들은 자신들의 의지에 기대 살았다."('그들이 살았던 곳' 중)

카버가 시한부 선고를 받은 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해 쓴 ‘2020’ 같은 시는 오늘날의 독자들에게도 큰 울림을 선사한다.

“친구들이여, 그대들을 사랑한다, 진심이야./그리고 내가 운이 정말 좋아서, 특별한 혜택을 받아서, 오래 살아남아 증인이 되기를 희망한다./믿어줘, 나는 그대들에 대해, 그리고 우리가 여기서 함께 지냈던 시절의/가장 빛나던 순간들에 대해서만 말할 거야!/살아남은 자가 기대할 만한 무언가가/있어야지. 늙어가고 있고, 모든 것들을 모든 이들을 잃고 있는데.”

이 한 권의 시집은 카버 문학이자 동시에 카버 그 자신이다. 카버의 팬인 독자라면 이 ‘카버 완전판’ 시집을 처음부터 따라 읽어도 좋고, 마음 가는 대로 아무 곳이나 펼쳐 읽어도 좋다. 어느 페이지라도 카버의 조각 일부일 테니.

한소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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