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경·김태리 대필한 서예가 인중 이정화
아버지 따라 일곱 살 때 붓 잡고
20년 동안 서예 공부·드라마 대필 등 외길
대선 개표방송서 17개 시·도 자연 서예로 표현
"서예는 고리타분하지 않다는 이미지 지키고파"
'뿌리 깊은 나무', '미스터 션샤인', '호텔 델루나'를 비롯해 지난 1월 종영한 '옷소매 붉은 끝동'까지 드라마 속 연서, 상소문, 반성문은 누가 썼을까.
획마다 절절한 감정을 담으며 글씨만으로 연기하는 청년 서예가 이정화(30)를 최근 화상으로 만났다. 서예의 매력을 묻자 그는 "일단 글씨 쓸 때 먹이 번지는 모습이 아름답다"며 애정을 담뿍 드러냈다. "서예 할 때 필요한 문방사우 가운데 가장 중요한 건 한지와 먹이거든요. 한지는 은은한 달빛의 색을, 먹은 우주의 색을 닮았다고 해요. 그럼 서예는 은은한 달빛 위에 나의 우주를 담아내는 것이죠."
그는 자신을 서예 하는 사람, '서예인'으로 소개했다. 그에게 서예는 "마치 가족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다. '대장금', '추노' 등 각종 드라마 포스터에 붓글씨를 쓴 송민 이주형 서예가를 아버지로 둔 그는 일곱 살 때 처음 붓을 잡았다. 붓이라는 개념을 알게 된 건 기억이 안 날 정도다. 유치원이 끝나면 곧장 부모님이 계신 서예학원으로 향해 먹을 갈던 아이에게 서예는 늘 옆에 있던 것이었다. "너 한번 해볼래?"로 시작해 서예에 빠져든 그는 20년 넘게 붓을 잡고 있다. "매일 사랑스럽진 않고 가끔 힘들게 할 때도 있죠. 마음처럼 글씨가 안 써질 땐 그런대로. 제가 쏟아내는 말을 종이가 다 받아주는 걸 보면서 위로를 받기도 해요."
대학에서 서예학을 막 시작한 스무 살 드라마 '동이'에서 한효주 대필을 맡은 이후 그는 신세경, 김태리, 아이유 등 배우들 대신 글씨를 썼다. 인물의 감정이나 성격에 따라 필체는 달라진다. 그는 "배우의 얼굴이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도 글씨 하나로 감정을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집중해서 쓴다"고 설명했다. '뿌리 깊은 나무'에서 실어증이 있는 소이(신세경)가 눈물을 흘리며 글씨를 쓰는 장면에선 덩달아 울컥했다. '미스터 션샤인'에서 애신(김태리)이 유진 초이(이병헌)에게 내미는 '보고십엇소'를 쓸 때는 강인한 인물이 연정을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했다. 그는 "'저 글씨 안에서 애신이 유진 초이를 정말 좋아하는 게 느껴진다'는 댓글에서 오는 희열감이 있었다"며 "배우가 된 것처럼 글씨를 쓰고 그 안에 다양한 감정을 담을 수 있다는 게 행복하다"며 웃었다.
그의 글씨는 자연을 담기도 한다. 지난 9일 MBC 대선 개표방송에서 그는 '붓끝에서 피어나는 민심'을 주제로 전국 17개 시·도를 상징하는 낱말을 서예로 표현했다. "서울을 상징하는 '광화문'은 단번에 떠올랐어요." 낱말의 자음, 모음은 광화문 지붕의 경사가 됐다. 강원의 '설악산'을 쓸 땐 자음 시옷에 산을 담아냈다. 산, 나무, 흙… 자연의 유려함은 그에게 영감이 된다. "선은 단순히 점과 점을 잇는 거지만 우리가 쓰는 건 살아 있는 획이라고 배웠어요. 그래서 더 다양하게 표현해야 한다고요." 그가 이야기하는 서예는 무엇보다 자유롭다. 그는 "서예를 보시는 분들도 꼭 글자를 읽으려고 하기보다는 전체적인 느낌으로 받아들이면 좋겠다"고 했다.
청년 서예가로서 그의 목표는 깊이 있는 공부로 전통을 이어가되 계속해서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 그는 작품활동은 물론 강연, 예능, 드라마로 종횡무진 활동하며 "서예는 고리타분하지 않다"는 이미지를 몸소 만들어가고 있다. 주목이 부담되진 않냐는 질문에 그는 "아직까진 기분 좋은 책임감"이라며 웃었다. "서예가 주목받는 건 저를 비롯한 이 시대의 서예가들이 너무도 기다렸던 일입니다. 그래서 더 잘해야겠다고 생각해요."
그는 매번 "오늘 내가 쓴 문장처럼 살기로" 다짐한다. 좋은 문장만 종이 위에, 가슴 속에 담으며 그는 앞으로도 서예인으로 살고 싶다고 했다. "저는 싫증을 잘 내는 성격인데 글씨만큼은 그러지 않았거든요. 나중에 제 아이가 생긴다면 '엄마는 당연히 서예하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도록 (제가) 어느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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