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 운동가 주디스 휴먼 자서전 '나는, 휴먼'
美 재활법 504조 투쟁 등 최전선서 싸운 장애 운동가
클린턴·오바마 행정부선 장애 권리 행정가로
포용적 세상 만들기 위한 '낙천주의적 투사'의 기록
"온 세상은 내가 아픈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픈 사람은 집 안에서 침대에 누워 있다. 아픈 사람은 밖에서 놀지 않고, 학교에 가지도 않는다. 아무도 그들이 밖에서 놀거나, 어떤 무리의 일원이 되거나, 세상의 한 부분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내가 세상의 한 부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 사실을 갑자기 깨달았다."
미국 장애 운동의 대모로 불리는 주디스 휴먼(74)은 생후 18개월에 앓은 소아마비 후유증으로 사지마비 장애인이 됐다. 배려심 깊은 부모와 이웃이 세상의 전부였기에 장애를 의식하지 못했던 그의 삶은 여덟 살이 되면서부터 달라졌다. 친구와 사탕 가게에 가던 중 우연히 마주친 한 남자아이가 휠체어를 쳐다보며 "너 아프니"라고 소리치는 순간 굴욕감을 느꼈다. 사람들이 자신이 세상의 한 부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갑자기 깨달았다.
신간 '나는, 휴먼'은 장애 운동가이자 미 클린턴·오바마 행정부와 세계은행(World Bank) 등에서 장애 권리 행정가로 활동한 휴먼의 자서전이다. 미국 장애인 권리의 초석이 된 재활법 504조(1973)와 미국장애인법(ADA·1990) 입법을 위해 그와 동료들이 벌인 소송과 시위 등 투쟁의 역사를 기록한 장애 운동 역사서로도 읽힌다. 책은 휴먼이 '낙천주의적 투사'로 성장하는 데 영향을 미친 인생의 결정적 사건을 중심으로, 더 나은 세상을 향한 그의 다짐과 깨달음의 순간을 상세히 보여준다.
사탕 가게 사건 이후 또 한 번의 큰 깨우침은 바로 이듬해 찾아왔다. 그는 장애 어린이를 위한 여름 캠프에 참가하면서 처음으로 자유를 맛봤고, 사회가 자신과 같은 장애인을 포함한다면 어떤 느낌일지 생각해보게 됐다. 보수를 받은 진행 요원이 있는 유료 캠프였다. 장애 어린이의 옷을 입혀 주고 화장실에 데려가는 일이 누군가의 선함에 달려 있지도, 짐이 되지도 않았다. 휴먼은 "호의나 관대함에 기대지 않고 모든 세계에 접근 가능했고, 너무 많은 것을 한꺼번에 부탁하지 않기 위해 남몰래 필요한 일들에 순위를 매길 필요가 없었다"고 했다.
성인이 된 후로는 거듭되는 차별과 배제를 넘어서야 했다. 대학 졸업 후 교원 자격증 시험에서 구두와 필기 시험을 통과하고도 장애를 이유로 건강검진에서 탈락했다. 그는 교사 면허를 불허한 뉴욕시 교육위원회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 이겨 교사가 됐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장애인이 주체가 된 시민권 단체 '행동하는 장애인'을 조직했다.
1977년에는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크립 캠프'(2020)로도 만들어진 샌프란시스코 연방 정부 건물 점거 사건을 100명 넘는 장애 동료들과 함께 이끌었다. 장애인 차별을 금지한 재활법 504조가 1973년 입법됐지만 조지프 칼리파노 당시 보건교육복지부 장관이 시행령 서명을 미뤘다. 이들은 활동 보조인도 없이 24일간 연방 정부 건물을 점거했고, 결국 서명을 받아냈다.
휴먼의 지난한 투쟁의 목표는 단 하나, 한 사람의 시민으로 사는 것이었다. 지역 사회 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 장애가 있는 혹은 없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를 바랐다. 그는 조지 H.W. 부시 대통령이 미국장애인법에 서명하던 순간을 묘사하며 "나는 마흔한 살에 마침내 동등한 시민이 됐다"고 밝혔다.
휴먼은 힘겨웠던 차별의 기억을 되새김으로써 협력의 가치를 설파한다. 그가 태어난 1940년대 후반만 해도 미국에서 장애가 있는 아이는 부모가 키우지 않고 시설에 보내는 게 일반적이었다. 장애를 바라보는 오늘날의 인식은 하루아침에 형성된 게 아니다. 휴먼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이 저항하고 연대하고 협력한 결과다. 그는 "세상을 바꾼 이야기는 어떤 것이든 항상 많은 사람이 함께 만든 이야기"라고 강조한다. 전문 작가 크리스틴 조이너와 함께 집필한 책이 휴먼의 무용담에 그치지 않고, 그의 장애 동료나 조력자들에 대해서도 상당한 비중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도 그래서다.
무엇보다 휴먼이 이 책을 통해 강조하는 것은 평등과 공정성이다. 그가 말하는 평등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하는 경향이 아닌 접근 기회의 형평성이다. 그는 "우리는 경사로, 더 넓은 출입구, 안전 손잡이, 수어 통역사, 자막, 접근 가능한 기술, 음성 안내, 점자로 된 문서, 지적장애인과 지체장애인을 위한 활동 보조인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며 '이러한 것들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같은 권리를 요구하는데도 '불만이 많다', '이기적이다'라는 틀에 갇히고 만다"고 적었다.
이동권 보장을 촉구하며 지하철 출퇴근길 시위를 이어온 장애인 단체에 대해, 맞서 싸워야 할 대상으로 규정한 서울교통공사의 내부 문건이 알려져 파문이 일었다. 우리 사회의 약자 차별은 공고해지고 있고 공정·정의·상식을 기치로 내건 새 정부 출범은 이제 한 달 남짓 남았다. 장애가 있다고 해서, 또는 특정 성별·인종이어서 그들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대신 그들에게 씌워진 혐오를 지우고 공동체의 의미 있는 구성원으로 존중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공정과 정의라고 이 책은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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