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사육되던 곰 22마리, 미국 보호시설로
60시간 긴 여정 끝에 도착, 새로운 생활 시작
국내 남은 360여 마리 사육곰 위한 방안 찾아야
14일 오전 강원 동해시 한 사육곰 농장은 동물보호 활동가, 수의사, 안전요원 등 수십여 명의 사람들로 북적였다. 이들은 다음날 곰 22마리의 미국 이주를 돕기 위한 마지막 작업에 몰두했다. 곰들은 마취를 위해 전날 굶은 데다 평소와 다른 분위기에 흥분한 상태였다.
"목소리를 낮춰주세요. 무인기(드론)도 안 됩니다. 최소한 인원으로 정숙하게 진행됐으면 합니다." 정동혁 충북대 수의대 교수가 당부했다. 마취를 앞둔 곰을 최대한 흥분시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현장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정 교수가 철창 속 곰 두 마리의 엉덩이를 향해 각각 마취제를 쏘자 곰의 비명이 잇따라 울려 퍼졌다. 점차 움직임이 느려진 곰들은 20여 분 만에 잠들었다. 활동가와 안전요원들은 곰을 우리에서 빼내기 위해 절단기로 철창을 잘라냈다. 수의사들은 철창 속으로 들어가 마취 여부를 확인한 후 곰을 들것에 실어 나와 바닥에 눕혔다. 웅담 채취용으로 길러진 곰이 10여 년 만에 철창 밖으로 나온 순간이었다.
구조 전까지 뜬장(배설물을 쉽게 처리하기 위해 밑면도 철창을 깔고 땅에서 들린 형태로 만든 사육장)에서 식육 부산물을 먹으며 지낸 곰들의 건강 상태는 좋지 않았다. 김영준 국립생태원 연구실장은 "피부병으로 몸 곳곳의 털은 빠져있고, 10년 넘게 땅에 발을 디딜 수 없어서 발바닥이 거칠게 갈라져 있다"고 설명했다.
수의사와 활동가들은 건강검진을 끝낸 곰을 대형맹수용 이동장(크레이트)으로 옮겼다. 지게차는 이동장을 조심스럽게 4대의 무진동 차량에 나눠 실었다. 차량에서 하룻밤을 보낸 곰들은 다음날 오후 미국 로스앤젤레스(LA)행 비행기에 올랐다.
사육곰 22마리, 美 야생동물 보호시설로 가다
동물보호단체 동물자유연대(동자연)는 구조한 곰 22마리를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 인근에 위치한 야생동물보호단체(TWAS) 보호시설(생크추어리)로 보냈다. 생크추어리는 동물이 자연사할 때까지 본래 서식지와 최대한 유사한 환경에서 돌보는 것을 목표로 운영하는 곳이다. 동자연은 2020년 7월 가장 환경이 열악했던 농가 중 하나였던 이곳에서 곰들을 구조했다. 정작 국내에 대형 포유류를 위한 보호공간은 없었다.
동자연은 2018년 한 동물원 내 콘크리트 방에 갇혀 있던 사자 가족 세 마리를 구조해 이주시켰던 인연을 계기로 TWAS에 곰 이송을 제안해 허락을 받았다. 미국 내 수입 허가를 비롯한 해외 및 미국 내 운송비용은 TWAS가, 국내 운송비용은 동자연이 부담했다. 총 비용만 10억 원이 넘게 들었다. 정진아 동자연 사회변화팀장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영향으로 화물기 확보가 어려워 1년 넘게 지연됐다"며 "이제라도 곰들이 새 보금자리에서 잘 살길 바란다"고 말했다.
어릴 때 옆 칸 곰과 싸워 앞발과 뒷발 한 쪽씩을 잃은 '오스카'와 선천적 실명을 안고 태어난 '글로리아'도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사육곰들은 협소한 공간 탓에 옆 칸 곰과 싸우다 발가락이나 손가락이 잘리는 경우가 많다. 이혜원 동자연 부속동물병원 원장은 "오스카와 글로리아는 다행히 생활에 지장이 없다"며 "재활 적응 프로그램을 거치면 충분히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기대했다.
40여 년 전 시작된 사육곰의 비극, 여전히 진행 중
사육곰의 비극은 4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부는 1980년대 농가 수익을 위해 일본, 말레이시아 등으로부터 사육곰 수입을 장려했다. 이후 동물 보호 여론이 형성되면서 1985년 사육곰 수입은 금지됐고, 우리나라가 멸종위기야생동물의 국제 간 거래에 관한 협약(CITES)에 가입한 1993년 수출 판로마저 막혔다. 정부는 1999년 농가 손실 보전을 위해 24년 이상 곰의 웅담 채취를 합법화했고, 2005년에는 다시 기준을 10년으로 낮췄다. 2014년에는 당시 남은 사육곰 967마리의 번식을 막기 위해 정부가 중성화 수술을 시켰다. 이 곰들은 웅담을 찾는 이들이 줄면서 애물로 전락했고, 개 사료와 잔반을 먹으며 방치됐다.
국내에는 여전히 360마리의 사육곰(올해 1월 기준)이 남아 있다. 환경부가 '2026년 곰 사육 종식'을 선언하고 2025년까지 전남 구례군과 국립생태원이 있는 충남 서천군에 보호시설을 만들기로 했지만 수용 개체 수는 130여 마리에 불과하다. 남은 230여 마리에 대한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 조희경 동자연 대표는 "이번 구조 활동은 사육곰이 야생동물 보호구역에서 살 수 있게 된 첫 사례"라며 "사육곰들을 위한 공간이 국내에 마련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60여 시간 거쳐 도착한 곰들, 10년 이상 자유롭게 살기를
16일 LA공항에 도착한 곰들은 다시 19시간 육로를 달려 콜로라도주 덴버 인근 TWAS 보호시설에 무사히 도착했다. 60여 시간 가까이 걸린 긴 여정이었다. 동물자유연대가 17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공개한 영상을 보면 평생 뜬장에 살았던 곰들은 이동장 안에서 쉽게 나오지 못하다 현지 활동가가 초코과자를 주자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뗐다. 계류장으로 나온 곰들은 주변을 탐색하기도 하고 물을 마시거나 사과를 움켜쥐고 먹는 등 점차 안정된 모습을 보였다.
이들은 계류장에서 길게는 2개월가량 적응 훈련을 마친 후 3,900만㎡가 넘는 부지의 보호시설에서 사육곰이 아닌 반달가슴곰으로 살아가게 된다. 반달곰의 수명이 20~25년임을 감안하면 이들은 10년 이상 자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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