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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쓰는 노조간부 "스스로를 발전시키려는 노력이 진정한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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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쓰는 노조간부 "스스로를 발전시키려는 노력이 진정한 운동"

입력
2022.03.12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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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혁 전국식품산업노동조합연맹 대구경북본부장
부모님과 두 형 모두 교사, 혼자 다른 길 걸어
부동산업 실패 후 회사에 취업해 자연스레 정착
노조 활동의 대원칙 “충분히 들어주고 소통"
딸 위해 '뱀파이어' 동화 쓰다가 2017년 장편 소설 출간


이시혁 전국식품산업노동조합연맹 대구경북본부장은 "노조와 지역 공동체, 우리 사회에 저의 활동이 도움이 된다면, 작은 몸부림이 희망의 메시지가 될 수 있다면 기꺼이 분골쇄신하겠다"고 말했다. 김민규 기자

이시혁 전국식품산업노동조합연맹 대구경북본부장은 "노조와 지역 공동체, 우리 사회에 저의 활동이 도움이 된다면, 작은 몸부림이 희망의 메시지가 될 수 있다면 기꺼이 분골쇄신하겠다"고 말했다. 김민규 기자


"짝!"

큰형이 동생의 따귀를 찰지게 올려붙였다. 그리고는 종이 쪼가리 하나를 툭 던졌다. 쪽지에는 모 식품회사 신입사원 모집 공고문이 담겨 있었다. "잔말 말고 여기로 가라." 동생은 형의 불호령에 군말 없이 회사에 지원했다. 동생의 나이는 서른 살, 늦깎이 신입사원이었다. 동생은 잠시 쉬어가는 셈 치고 딱 석 달만 회사에 적을 두고 ‘은거’하기로 했으나 뜻밖에도 '적응'해버렸다. 입사 4년차에 반장에 올랐고, 2010년 노조 간부가 됐다. 2020년부터 전국식품산업노동조합연맹 대구경북본부장이라는 중책을 맡고 있는 이시혁(56)씨 얘기다.

이 본부장에 따르면 큰형에게 따귀를 맞을 즈음 그는 집안의 별종이었다. 부모님이 교사였고, 두 형도 교사의 길을 걷기 시작한 때였다. 유독 이 본부장만 교사직을 거절하고 독자 노선을 추구했다. 나쁜 짓은 하지 않았지만 중고교 때부터 친구들과 어울려 지내는 걸 좋아했다. 미술 대학에 적을 두고 일찍부터 사업에 뛰어들었다.

서른 살, 잔치는 끝났다

대학을 다니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부동산 사업에 뛰어들었다. 리조트, 오피스텔 분양 사업이었다. 사람 대하는 데는 자신 있었고, 자신감 만큼이나 사업이 잘 됐다. 하루 매출이 500만원을 넘는 날도 있었다. 20대 중반, 본인 말마따나 자부심이 하늘 똥구멍을 찔렀다. 그러나 몰락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금융실명제가 예고되면서 갑자기 돈이 빠져나갔다. 분양 취소가 줄을 이었다. 매출은 바닥에서 지하로 뚫고 내려갔다. 부동산을 모두 처분하고도 남은 빚이 1억8,000만원이었다. 당시 최저임금이 1,085원, 사회초년생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돈이었다. 은행에서 대출금 상환 압박이 들어왔다. 집안이 발칵 뒤집어졌다.

"300만원요."

아버지와 큰형이 빚이 얼마나 되냐고 물었을 때 맨 처음 내놓은 대답이었다. 숨긴다고 숨겨질 일이 아니었다. 300만원으로 해결될 줄 알고 집에서 선뜻 그 돈을 내줬지만 은행의 독촉은 그치지 않았다. "500만원요" "사실은 800만원입니다" 숱한 압박에도 차마 있는 그대로 답을 하진 못했다. 결국 모든 것을 알게 된 큰형이 해결한 후 그의 따귀를 올려 붙였던 거였다. 그때까지도 언제고 다시 사업에 뛰어든다는 생각이 있었으나 당분간은 형님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속죄하는 마음으로 회사에 출근했다.

속죄로 시작한 회사 생활, 노동자 대표로...

"첫날 근무하고 나서 제 머릿속을 맴돈 단어는 '지옥'이었습니다. 평생 이 일을 하라면, 그건 지옥으로 꺼지란 말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하루 12시간 동안 일했다. '지옥에서의 한달' 후 받은 첫 급여는 52만원이었다. 사업할 때 '운수 좋은 날' 벌어들이는 수익의 10%에 불과했다. 월급이 나온 날 친구들을 불러서 한턱 '쐈다.' 하룻저녁에 52만이 말끔하게 휘발했다. 아직은 꿈에 젖어 있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지옥 같은 한 달이 지나자 두 달째는 그럭저럭 적응이 되고, 어영부영 일년이 흘러갔다.

"다시 시작할까?" 그 즈음 전에 일하던 사업체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재입사 의중을 묻는 말에 거절 의사를 밝혔다. "다시 성공할 자신이 없었어요. 한 번 실패한 분야는 다시는 돌아보지 말자는 생각이었죠."

뒤늦게 깨달은 '소통의 힘'

2010년 그에게 새로운 운명이 찾아왔다. 작업 반장 직책을 맡아 업무에 몰입해있는데 누군가 등 뒤에서 그를 불렀다. 돌아보니 회사의 노조 위원장이 서 있었다. 현재 한국노총 성남 지역 의장직을 맡고 있는 박인수 위원장이었다. 그렇게 노조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노동조합 일을 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 겉에서 보던 노조와 속내가 무척 달랐다.

"노조라고 하면 시위나 파업을 떠올립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노동자들을 대변하기 위해서는 노조가 강력해야 한다는 생각이었죠. 그런데 박인수 위원장은 달랐습니다."

박 위원장의 활동 모토는 '대화와 소통'이었다. 그는 입버릇처럼 "실력 행사 없이 노동자의 권리를 취득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피 끓는 신임 노조간부에겐 썩 와닿지 않는 정책이었다. 위원장의 말을 따르면서도 늘 투쟁의 이유와 계기를 찾았다. 한 건이라도 제대로 터뜨려야 존재감을 인정받을 것 같아 조바심이 일었다.

하루는 조합원이 노조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그는 3시간 가까이 자신이 겪는 고충을 털어놓았다. 말이 길어질수록 점점 미궁으로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해결 가능한 고충이란 게 하나도 없어보였다. 노조간부라는 완장을 벗고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야기를 끝내고 보니 조합원의 표정이 사뭇 밝아져 있었다.

"제 얘기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속이 후련합니다."

그 순간 박인수 위원장이 강조했던 '소통'의 의미를 이해했다. 어릴 적 아버지도 종종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라"고 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들어주고 함께 고민하는 것이 이미 절반의 해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측이나 조합원들이나 난관 앞에서 고민한다는 점에서 똑같습니다. 각자의 말을 경청하고, 대화와 소통으로 풀어나가면 대부분 해결됩니다. 소통의 힘은 셉니다."

"내 영역만 지켜서는 세상이 안 변한다"

지부장이 된 이후 가장 먼저 손을 본 부분은 복지였다. 휴게실과 탈의실을 증개축하고 고급 안마 의자도 설치했다. 급한 민원을 처리한 뒤부터 개성적이고 창의적인 작업에 들어갔다. 교육자 집안 출신답게 ‘교육’에 힘을 쏟았다. 한국노총 달성지역지부와 대구지역본부 연계를 통해 조합원 교육을 실시했고, 가을에는 사측과 노사 상생 교육을 실시했다. 회사에서 단독적으로 교육을 실시한 건 처음이었다. 소통과 화합을 위해 조합원들에게 균형 잡힌 시각을 심어준다는 취지였다. 자연스레 조합원들을 향한 회사의 시각도 바뀌게 되었다. 교육을 통해 노사가 상생하는 문화를 형성한 덕인지 그해 회사 생산 효율이 10% 올라갔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15년에는 대구시에서 노사화합상을 수상했다.

집에서는 여전히 '이단아'였다. 특히 전교조 활동을 하는 큰형을 이해할 수 없었다. 활동을 교사 처우 개선 정도에 한정해야 한다는 것이 이 본부장의 생각이었다. 큰형은 생각이 달랐다. "내 영역만 지켜서는 세상이 안 변한다"고 주장했다. 명절에 만나면 으레 논쟁이 벌어졌다.

형을 이해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경북대에서 진행하는 노사전문가 과정을 밟던 중 일본의 모 자동차 회사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이씨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해당 회사의 노동조합은 적극적으로 정치 분야에 목소리를 내려고 애쓰고 있었다. 노조 관계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큰형에게서 들은 것과 비슷한 대답이 돌아왔다.

"결국 법이 바뀌어야 근본적인 부분에서 해결이 가능합니다. 우리가 정치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그날 이후 노조 활동의 폭과 깊이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 대화와 소통은 물론 보다 넓은 세계로 뛰어들어야 노조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지역에 식품 클러스터 단지가 반드시 필요

최근 그가 가장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부분은 식품업계의 현실이다. 평생 식품회사에 몸담고 있었던 까닭에 해당 분야의 사정에 정통하고, 잘 아는 만큼 지금의 현실이 아쉽고 답답하다.

"대구경북 식품업계는 영세합니다. 지역에 본사를 둔 대기업이 없을뿐더러 향토기업도 손에 꼽힙니다. 내용을 알고 나면 '위기'라는 생각이 저절로 듭니다."

더 많은 기업을 유치하고 지역에 본사를 둔 식품 산업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식품 클러스터 단지 유치가 필수라는 생각이다. 식품 업계들이 서로 연계하여 시너지를 내는데 클러스터 단지만 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좋은 일자리를 창출하는 방안이기도 하다.

"식품업계 종사자들은 아무래도 1차 산업에 준하다 보니 임금이 낮습니다. 다른 산업에 비해 아직 사람 손이 필요한 부분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윤이 낮다 보니 임금도 낮을 수밖에 없죠. 그렇기에 정부에서 산별 체제로 임금 조정을 하는 등의 노력이 필요하지만, 지역은 지역 대로 이 분야의 발전을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2020년 전국식품산업노동조합연맹 대구경북본부장이 되었지만 아직까지 갈 길이 멀다. 특히 코로나19로 여전히 지역 식품 업계가 어려움을 겪는 만큼 더욱 노사 간의 소통과 화합을 도모해야 한다. 앞으로도 이씨는 상생협력과 공동체적 발전을 위해 앞장설 것이다.

소설책 출간 "노조 활동의 일환이죠"

개인적인 활동도 주목할 만하다. 이 본부장은 2017년 2월에 장편 소설 '두번째 신'을 세상에 내놓았다. 뱀파이어를 좋아하는 딸을 위해 짧은 동화를 쓰다가 욕심이 생겨 장편을 완성했다. 신·구교도 간의 종교전쟁을 배경으로, 그 속에서 일어났던 잔혹한 억압과 혁명의 장면을 그려냈다. 조합 운동과도 상통하는 스토리라고 생각했다.

소설 출간은 엉뚱해 보이지만 이 또한 노조활동의 일환이다. 그가 노조원들에게 늘 강조하는 것이 시간이 나면 취미를 가지라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다른 세상에 눈을 떠야 한다는 조언이었다.

"의사 집안에 의사가 나오고, 교사 집안에 교사가 나옵니다. 세상은 한없이 넓고 다양한데도 경험의 폭이 너무 좁습니다. 삶의 다양성, 그리고 노조의 발전을 위해서도 노조원들이 보다 넓은 세상을 경험해야 합니다."

평소 독서를 즐기는 그였다. 노조원들에게만 다양한 활동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본인이 몸소 실천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창작의 고해에 몸을 던졌다. 이씨는 소설뿐만 아니라 시도 틈틈이 써 시집 '버스 정류장'을 출간했다.

"삶에는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지만, 어쩔 수 있는 부분에서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름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하는데, 아직도 할 일이 태산인 느낌입니다. 노조와 지역 공동체, 우리 사회에 저의 활동이 도움이 된다면, 작은 몸부림이 희망의 메시지가 될 수 있다면 기꺼이 분골쇄신하겠습니다!"

이시혁 전국식품산업노동조합연맹 대구경북본부장이 펴낸 소설책. 딸을 위해 '뱀파이어' 동화를 쓰다가 내친 김에 장편 소설을 집필했다. 김민규 기자

이시혁 전국식품산업노동조합연맹 대구경북본부장이 펴낸 소설책. 딸을 위해 '뱀파이어' 동화를 쓰다가 내친 김에 장편 소설을 집필했다. 김민규 기자


김광원 기자 jang750107@hankookilbo.com
홍지혜 대구한국일보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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