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2,500년 전 그리스 아테네의 데모크라티아(demokratia, 평민과 지배의 합성어)는 민주주의의 원형으로 불리지만 사실 당시 참정권은 모두에게 주어진 게 아니었다. 귀족들과 전쟁에 참여한 일부 시민들에게만 부여됐다. 프랑스혁명 후 서구 근대 국가에서 투표권이 확대된 것도 징병제와 무관하지 않다. 목숨을 건 대가였던 셈이다. 가난한 공장 노동자도 투표하게 된 건 산업혁명 이후 차티스트 운동이 일어난 19세기 후반이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참정권은 남성의 전유물이었다. 국가 차원에서 여성 참정권이 처음 허용된 건 1894년 뉴질랜드에서였다. 미국 전역에서 흑인들의 투표권 행사가 전면 가능해진 것도 1965년이다.
□ 국민들이 직접선거로 국가 지도자를 뽑는 건 결코 당연한 게 아니다. 오랜 기간 수많은 이들의 희생으로 얻은 귀중한 성취다. 인류사는 참정권이 확대돼 온 과정이라 할 수도 있다.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획기적인 남녀 평등 선거권을 천명한 것도 3·1운동의 또 다른 성과이고, 1987년 직선제 도입은 민주화 항쟁의 산물이었다. 우리가 대선을 치른다는 건 정말 감사해야 할 일이다. 주변국과 비교하면 더 자랑스럽다.
□ 아직 누굴 찍어야 할지 정하지 못한 이들도 적잖다. 맘에 드는 후보가 없는 건 물론이고 그나마 덜 나쁜 차악을 고르는 것도 쉽지 않은 비호감 선거다. 기권도 유권자의 의사표시란 주장도 나온다. ‘어차피 똑같아, 바뀌는 건 없어’라는 냉소와 체념도 팽배하다. 그러나 투표를 하지 않는 건 역사에 대한 망각이자 직무유기이다. 내일의 역사에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도 기표소엔 가야 한다. 투표도 하지 않은 채 4류 정치를 비난만 하는 건 의무는 다하지 않은 채 투정만 부리는 것과 같다.
□ 사실 저 자신도 스스로 맘에 들지 않을 때가 더 많지 않나. 시대나 부모가 맘에 안 든다고 내 삶을 방치할 순 없듯 지지할 후보가 없다고 소중한 한 표를 버릴 순 없다. 2008년 6월 강원 고성군수 선거에선 단 한 표 차로 승부가 갈렸다. 한 표가 역사도 바꾼다. 한심한 선관위 행태가 미덥지 못해도, 그렇기에 더 투표해야 한다.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이제 유권자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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