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내 작업 조선인 전담" 적혀 있어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와 일본 우익이 “사도 광산에서 조선인 강제노동이 없었다는 증거”라고 주장하는 자료에 채굴이나 운반 등 위험한 갱내 작업은 대부분 조선인이 담당했다는 사실이 적시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 우익은 ‘역사전쟁’ 운운하며 한국과의 대결을 강조하지만, 강제노동을 부인하는 주장을 뒷받침할 자료는 뚜렷히 제시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아베 전 총리는 지난달 27일 새벽 니가타현 사도 광산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추천에 신중한 일본 정부의 태도를 겨냥해 “역사전을 걸어온 이상, 도망가는 것은 안 된다”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그러면서 ‘사도광산사(佐渡鑛山史)’의 일부 사진 자료 등을 공유했다. 이는 전날 일본 우익의 역사 왜곡 근거지인 ‘역사인식문제연구회’ 사이트에 게재된 자료를 가져온 것이다. 이 연구회는 일본군 위안부나 강제동원 등 일제강점기 피해에 대한 한국이나 중국 등 주변국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고 강변해 왔다.
연구회는 과거 사도광산을 소유했던 미쓰비시금속이 히라이 에이이치 전 사도 광산 채광 과장에게 에도시대부터 쇼와시대까지 사도 광산의 역사를 정리하라고 의뢰해 쓴 ‘사도광산사’ 자료를 입수했다고 공개했다. 이어 이 책 845, 846쪽에 적힌 조선인 노무자를 “모집했다”는 표현과, 이렇게 온 조선인에 대한 처우를 묘사한 부분을 근거로 조선인 강제노동 사실을 부인했다.
845쪽에는 “조선인에 대한 대우와 임금 제도, 근무장려 방안 등은 대체로 내지인(일본인) 노동자와 같았다” “노동자들이 사택의 무료 대여, 공동 목욕탕 시설, 쌀, 된장, 간장 그외 생활필수품을 염가 배급했고 가족 상병 진료 등을 실시했다” 등의 내용이 적혀 있다. 다음 페이지에는 “3개월 이상 근무할 경우 ‘단체생명보험에 가입시키고 재적 중 보험료는 모두 회사가 부담하며, 재해에 대한 부조, 퇴직의 경우 급여관계 등에 내선(일본인과 조선인) 구별이 없었다”고 기술했다. 연구회는 이 자료를 근거로 이달 초 산케이신문과 니가타신문 등에 조선인 강제노동을 부인하는 광고도 게재했다.
하지만 지난달 27일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주최로 열린 학술 세미나에서 정혜경 연구위원이 같은 자료를 분석한 결과, 이 부분은 기존 자료를 참고해 옮겨적는 과정에서 정확한 실태를 기록하지 않은 것으로 평가됐다. 부상을 당했을 때 치료하고 보험료를 지급한다는 내용은 1943년 6월 7일 사도광산 측이 감독기관에 제출한 보고서에 적힌 내용과 동일하다. 그러나 사도 광산에서 일하다 탈출해 생전에 증언을 남긴 고 임태호씨는 갱내 작업 중 두 번이나 큰 부상을 입었으나 어떤 치료도 받지 못했고 병원에도 가지 못했다고 밝혔다.
오히려 이 자료에서 주목할 부분은 주로 채굴, 운반 등 위험한 갱내 작업은 조선인 노동자가 도맡았다고 적혀 있는 부분이다. 연구회가 공개한 846쪽에는 1943년 5월 업무별 조선인 및 일본인 노동자의 숫자가 적혀 있다. 암석을 깨고 광석을 채취하는 업무인 ‘착암(鑿巖)’에 종사하는 조선인은 123명, 내지인은 27명이었고, ‘운반’은 조선인 293명, 내지인 80명이었다. 당시 전체 노동자 수는 조선인 584명, 내지인 709명으로 일본인이 더 많았으나 위험한 갱내 작업은 주로 조선인 노동자를 투입했던 것이다. 연구회는 공개하지 않았지만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입수해 공개한 848쪽을 보면 아예 “조선인 노동자가 거의 전부 갱내 관계 작업에 종사했다”고 명시돼 있다.
갱내 작업은 수시로 떨어지는 암석 등에 깔리는 위험과 갱내에서 암석조각이 먼지로 떠돌아 흡수돼 일으키는 진폐증 등 생명을 위협하는 요소로 가득했다. 1944년 사도광산 진폐 실태를 조사한 의사의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분진의 평균 수치는 착암부가 810cc, 운반부가 360㏄로 나타났다.
1943년 6월 사도광산 측이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1942년 3월 기준으로 동원한 1,005명의 조선인 가운데 14.7%인 148명이 탈출했다. 니가타항에서 멀리 떨어진 섬이라 탈출이 극히 어려웠지만 이 통계를 보면 작업에 얼마나 위험하고 고됐는지 추측할 수 있다. 일본 측 주장대로 ‘모집으로 왔으니 강제노동이 아니었다’면 열악한 환경에 불만을 품은 노동자가 쉽게 다른 곳으로 떠나 이직할 수 있어야 했으나 그러지 못해 목숨을 걸고 탈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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