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탄중 푸팅 국립공원]
서울 7배, 세계 최대 오랑우탄 보호구역
"어우~" 부르자 '숲의 사람'들 몰려와
오랜만에 온 이방인 반겨, 지척에서 식사
카메라 촬영에 자세 잡고 장난 치기도
"어우~"
앞은 짧고 굵게 뒷소리는 길게 늘어뜨린다. 언뜻 의미 없는 함성 같지만 공원지킴이(ranger)들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비슷하게 흉내 내 봤지만 영 신통치 않다. 외국어처럼 '그' 말을 전문가에게 제대로 배워야 한다고 했다.
등짐을 짊어진 공원지킴이 세 명을 따라 밀림 깊숙이 들어갔다. 모기떼가 땀으로 흥건한 온몸에 달라붙었다. "어우~" "어우~" 외침만 숲의 고요를 깨웠다. 10분쯤 더 들어가자 '바스락' '촤아~' 소리가 들렸다. 멀리 있는 나무부터 높은 가지들이 도미노처럼 쓰러졌다가 다시 섰다. 그리고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오랑우탄이었다.
나뭇가지 사이로 빼꼼히 이방인을 살피던 암컷 산드라(28)가 땅으로 내려오더니 길안내를 하듯 공원지킴이들을 성큼성큼 앞질러 갔다. 뒤를 돌아보며 재촉하듯 멈춰 서기도 했다. "(오랑우탄이 아예 안 나타나 못 보고 돌아오는) 허탕을 칠 수 있다"는 얘기를 여러 명에게 들은 터라 산드라의 출현이 더없이 반가웠다.
놀라운 일은 연이어 벌어졌다. 공원지킴이들이 관람석 너머 20m 지점에 마련된 오랑우탄용 야외 식당에 과일들을 늘어놓으며 "어우~" 하고 부르자 사방의 나뭇가지들이 흔들렸다. 사람 수보다 많은 오랑우탄 10여 명이 몰려들었다. 인도네시아어로 '숲(utan 또는 hutan)에 사는 사람(orang)'을 뜻하는 만큼 공원에선 '몇 마리'가 아닌 '몇 명'으로 센다. 오랑우탄 세상에 초대받은 기분이었다.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에서 비행기로 1시간 20분, 차로 30분, 스피드보트로 30여 분(일반 목선은 3시간), 다시 밀림을 헤집고 들어가자 펼쳐진 새로운 세계다. 칼리만탄(보르네오)섬 중부칼리만탄주(州) 남쪽의 탄중 푸팅(Tanjung Puting) 국립공원이다.
서울 넓이의 약 7배(41만5,040ha)인 탄중 푸팅 국립공원은 멸종 위기에 처한 오랑우탄의 세계 최대 보호구역이다. 공원의 오랑우탄 인구는 3만 명으로 추정된다. 세계적인 오랑우탄 연구 권위자 비루테 메리 갈디카스(76) 박사가 '세계 오랑우탄 수도'라 명명한 곳이다.
탄중 푸팅은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유럽과 미국 등 서양인들은 꼭 오고 싶어하는 생태 관광지다. 서양인 관광객이 현지인 관광객보다 매년 많았다. 배우 줄리아 로버츠(1997년),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2014년) 등의 방문으로 더 유명해졌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관광객의 발길이 끊겼다는 소식을 듣고 설 연휴 전 찾아갔다.
실제 공원 매표소는 직원들만 지키고 있었다. 서양인들이 온전히 쉬기 위해 주로 탄다는 목선들은 공원 입구에 닻을 내리고 있었다. 코로나19 검사 결과를 보여 주고 출입 허가를 받은 뒤 스피드보트를 타고 공원 안쪽으로 들어갔다.
열대 식물들이 내뿜는 탄닌 때문에 강물은 흑색이었다. 강 양편으로 맹그로브가 끝없이 이어졌다. 오랑우탄에게 오후 3시쯤 먹이를 준다는 탄중 하라판(Tanjung Harapan) 캠프에 내렸다. 공원지킴이 아부(37)씨는 "오랜만에 오는 손님"이라고 반겼다.
밀림에서 만난 오랑우탄들은 모두 이름이 있었다. 일대에 33명이 산다고 했다. 아직 이름이 없는 아기까지 합하면 40여 명이다. 위계 질서도 뚜렷했다. 식당 중앙을 차지한 서열 2위 에르윈(35)은 식사를 하다가도 다른 오랑우탄이 식당으로 올라오면 쫓아냈다. 엄마 등에 매달린 아기들은 그 틈에도 과일을 집어먹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에르윈이 무서워 나무 위에 매달린 채 과일을 먹거나 식당을 바라만 보는 오랑우탄도 있었다. 이날 서열 1위(알파) 로제르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관람석 안쪽으로 들어와 과일을 달라고 하는 녀석들도 있었다. 팔도(24)는 공원지킴이 등짐을 뒤지기도 했다. 이방인을 경계하면서도 지척에 앉아 식사에 열중했다. 촬영을 하자 자세를 잡거나 공원지킴이들과 장난을 치기도 했다. 아부씨는 "먹이를 갖다 줘도 오지 않는 날도 있고, 3~4m 거리를 유지하는 게 보통인데 오늘은 특별한 날"이라고 말했다.
공원지킴이들은 매일 정해진 시간에 30㎏의 먹이를 제공한다. 영양 조절과 건강 점검을 위한 조치다. 털이 빠지는 등 아파 보이는 오랑우탄에겐 우유에 비타민을 타서 먹이기도 한다. 아부씨는 "식당에 장기간 나타나지 않으면 인간의 도움 없이 야생에 완벽하게 적응했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바로 곁에서 야생 오랑우탄을 관찰하고 그 선한 눈동자에 매료돼 2시간이 훌쩍 지났다. 그새 식사를 마치고 사라진 오랑우탄도, 새로 나타난 오랑우탄도 있었다. 작별 인사를 하자 팔도는 이방인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모두 건강하게 잘 지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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