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부남 상사가 성희롱' 다수 직원에 이메일
1·2심 "비방 목적 인정된다" 유죄 판단했으나
대법 "공공이익 관한 것" 무죄 취지 파기환송
상사로부터 겪었던 성희롱 피해를 동료 직원들에게 알리고 '유사한 일을 겪을 시 적극 신고하라'고 당부했다면 명예훼손죄로 처벌될까. 상대를 비방하려는 게 아니라 직장 내 성희롱을 예방하고 피해를 구제하려는 것이었다면 명예훼손죄로 볼 수 없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 3부(주심 노정희 대법관)는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법상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A씨에게 벌금 30만 원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동부지법으로 돌려보냈다고 23일 밝혔다.
"술자리서 손잡고 문자 계속 보내" 이메일 돌려
에스알에스코리아 주식회사(KFC)에서 근무하던 A씨는 2016년 전보 발령을 받자 사측에 사직 의사를 표한 후, 전국 208개 매장 대표 및 본사 직원 80명에게 '성희롱 피해 사례에 대한 공유 및 당부의 건'이라는 제목의 이메일을 보냈다.
이메일 내용은 2014년 10월 20일 팀장 B씨 및 사원 3명과 가진 술자리에서 B씨로부터 성희롱 및 성추행 피해를 봤다는 것이었다. 유부남인 B씨는 참석한 다른 사원들 몰래 손을 잡았고, 술자리가 있던 당일 밤 9시쯤부터 2시간 30분여간 13회에 걸쳐 부적절한 문자를 보냈다고 한다. B씨가 '맥줏집 가면 옆에 앉아요' '집에 데려다 줄게요' '남친(남자친구)이랑 있어서 답 못 넣은 거니' 등의 문자를 계속 전송했지만, A씨는 답장을 하지 않았다.
A씨는 또 이메일을 통해 "B씨가 현재 성희롱 고충상담 처리 업무를 맡고 있으니, 자신과 같은 일을 겪을 경우 담당부서가 아닌 팀장이나 고용노동부, 국가인권위원회 등으로 신고하라"고 당부했다. "불이익이 될까 싶어 저처럼 참고 넘어가지 마시고 부당 내용을 공유 및 신고하라"고도 덧붙였다.
"명예훼손적 표현 위험 자초한 측면 커"
A씨는 B씨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고소당했고, 검찰도 A씨의 혐의가 인정된다고 보고 그를 재판에 넘겼다. 1심과 2심은 A씨가 비방 목적으로 이메일을 보낸 것으로 판단해 벌금 30만 원을 선고했다. 1심 재판부는 "A씨는 원하지 않는 인사 발령을 한 B씨의 명예를 훼손하기 위해 이 사건 메일을 작성했다고 보인다"며 "B씨에 대한 비방 목적이 있었다고 인정된다"고 밝혔다. 2심도 1심 판단을 유지했다.
대법원은 그러나 하급심과 달리 A씨가 공공의 이익을 위해 이메일을 보냈다고 봤다. 대법원 판례상 명예훼손 대상이 된 사람이 그런 표현을 자초한 게 아닌지, 표현의 동기는 무엇인지 등을 따져 공공 이익에 부합한다면 비방의 목적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취지다.
대법원은 "B씨가 술자리에서 부하직원과 부적절한 신체접촉을 했다"며 "A씨에게 성희롱적인 내용이 포함된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등 스스로 명예훼손적 표현의 위험을 자초한 측면이 크다"고 지적했다. 대법원은 A씨가 이메일에서 B씨를 상대로 인신공격적인 표현을 쓰지 않았다는 점도 비방 목적이 아니라는 근거로 삼았다.
대법원은 "우리 사회의 가해자 중심적 문화와 인식, 구조 등에 비춰볼 때 A씨로서는 자신의 성희롱 피해 사례를 곧바로 알릴 경우 발생할 수 있는 2차 피해 등에 대해 두려움을 가질 수 있다"면서 "A씨는 자신의 사례를 공유함으로써 직장 내 성희롱 예방과 피해구제에 도움을 주고자 이메일을 발송했다"고 결론 내렸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