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질투엔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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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질투엔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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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22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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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여성적인 것'이란 텅 빈 기표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과학을 읽습니다. 역사 에세이스트 박신영 작가는 '백마 탄 왕자' 이야기에서 장자상속제의 문제를 짚어보는 등 흔히 듣는 역사, 고전문학, 설화, 속담에 배어 있는 성차별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번갈아 글을 쓰는 비평 전문가 이연숙 작가는 영화, 미술, 만화 등이 여성을 어떻게 그리는지를 통해 성별화된 감정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웹툰 '치즈인더트랩'은 높은 인기 덕에 드라마로 제작됐다. 홍설(김고은)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따라한 손민수(윤지원)가 등장하는 장면도 웹툰을 그대로 재현했다. tvN 캡처


순끼 작가의 만화 '치즈인더트랩'(치인트)은 로맨스와 서스펜스가 결합된 장르물로 약 7년간 연재되며 큰 인기를 끌었다. 이 작품은 주인공인 홍설이 대학 생활을 하며 만나는, 어딘가 ‘쎄한’(수상한) 인물들의 실체에 다가가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홍설과 비슷한 모습으로 등장한 손민수. 네이버웹툰 캡처


'손민수하다'의 탄생

치즈인더트랩 때문에 누군가 똑같이 따라 한다는 뜻의 '손민수하다'란 신조어까지 생겨났다. 구글 캡처


홍설과 치인트의 성장을 위해 한 몸 바쳐 '어그로'를 끌었던 인물을 꼽자면 단연 손민수다. 손민수는 치인트의 대표적인 '고구마'(답답한) 에피소드인, '조별과제편'(1부 40화~2부 1화)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손민수는 기분 나쁠 정도로 굽실대지만 자기 일을 제대로 해오지 않는 조원으로, 결국 홍설이 (생전 처음으로) 'D 학점'을 받게 만든다. 이는 물론 성실한 홍설과 그런 홍설에 이입한 독자들의 관점에서 충분히 지탄받아 마땅한 중범죄지만, '손민수하다'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키기엔 아직 이르다.

본격적으로 손민수가 '손민수하게'되는 과정이 전개되는 곳은 '새학기편'인 3부부터다. 그녀는 다소 '찌질했던' 첫 등장과는 다르게 '예뻐진',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홍설의 머리 모양과 옷차림을 연상시키는 모습으로 홍설 앞에 등장한다. 어느 날 두 사람의 옷차림이 완전히 일치하자 홍설은 이를 '유행'으로 치부하고 넘어가려 하지만, 독자들은 손민수의 회상 장면을 통해 이러한 우연이 철저히 계획된 것임을 알 수 있게 된다. 바로 손민수가 나름의 연구를 거쳐 홍설을 '롤모델'로 삼은 것이다(3부 9화). 손민수에게 있어 홍설은 '모든 것을 다 가진' 로맨스 소설 속 인물로,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는 동경심과 '쟤가 가진 것을 내가 갖고 싶다'는 질투심을 품게 하는 대상이다.

극이 전개되며 손민수의 홍설 흉내는 다른 인물들이 그녀의 뒷모습을 홍설로 착각할 만큼 진화하기 시작한다. 결국 손민수라는 치명적인 분신(double)은 지금껏 웬만한 일은 혼자 삭혀 왔던 홍설의 인내심을 완전히 바닥냄으로써, 치인트의 가장 강력한 악당이라는 명예를 얻는다.

인내심이 바닥난 홍설. 네이버웹툰 캡처


'여자의 질투'로만 치부할 수 있을까?

이처럼 '손민수하다'는 남의 행동거지나 외모를 모방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특정 종류의 여성과 여성 간 관계를 예시하기 위해 광범위하게 유행하고 있는 '손민수하다'를 보는 관점은 크게 두 가지가 있을 것 같다.

우선 하나의 관점은 다음과 같다. '손민수하다'는 여자들에 대한 오랜 편견을 반복해서 재생산할 뿐인 수사라는 것이다. 여자들은 질투가 많다는 편견 말이다. 한때 유행했고 다시 유행 중인 진화심리학 이론들은 (남자와 다르게) 여자란 더 우월한 '수컷'을 차지하기 위해 다른 여자들을 경계하고 질투하도록 진화해왔다고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프로이트의 '남근 선망(penis envy)'에 대한 남성 중심적인 해석은 '여자는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질투한다'고 가정해왔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개별적인 '손민수들'의 고유한 '인간됨'을 보지 못하고 오직 질투라는 단일한 항으로 그들 존재를 환원하는 바로 그 설명틀이 아닌가?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손민수하다'의 유행이 의미하는 바는 내면화된 여성혐오의 반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다른 관점도 있다. 바로 손민수 같은 여자들이 정말로 누군가를 질투하거나 '베끼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거나 순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손민수하다'를 페미니스트의 관점에서 유용한 것으로 사용하자는 것이다. 왜 그래야 할까? 때로 페미니즘은 그간 평가절하되었던 여성성에 보다 긍정적인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 부정적이고 공격적으로 재현되는 여성성들을 부인해온 전력이 있다. 우리는 보다 면밀하게 '손민수하다'라는 용어가 암시하는, 두 여자 사이의 '뺏고 뺏기는' 관계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도대체 둘 사이에서 무엇이 순환하고 있길래, 손민수는 치인트의 가장 강력한 악당으로 자리 잡게 되었는가?

홍설 흉내 내기를 연구 중인 손민수. 네이버웹툰 캡처


손민수가 뜯어먹고 홍설이 뜯어먹힌 것

손민수가 한창 대담하게 '범행'을 저지르기 시작하던 때로 돌아가보자. 손민수의 그림자는 마치 홍설 눈에만 보이는 귀신처럼 그녀가 가는 곳마다 따라붙는다.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홍설이 남자친구인 유정에게 이런 상황을 토로하자 돌아온 대답은 매우 흥미롭고, 또 고약하다. "어… 담에 한번 자세히 볼게. 그런데 여자들 옷은 다 비슷비슷해 보여서…"(3부 19화)

유정의 관점에서, 홍설과 손민수에게는 식별 가능한 자기들의 고유한 개성은 단지 일련의 '비슷비슷한 옷'들 중 하나로 환원될 뿐이다. 만약 남들, 특히 남자들의 눈으로 볼 때 '여자들 옷이 다 비슷비슷해 보인다'면, 홍설은 어떻게 자기가 '뜯어먹히고 있다'는 사실을 진지한 문제로 다룰 수 있을 것인가? 다시 말해, 만약 홍설이 자기가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개성이라는 것이, 남들에게는 '비슷비슷한 (여성적인) 것'으로 환원될 뿐이라면, 도대체 누군가에게 뭔가를 뜯어먹히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가? 어쩌면 아예 일어난 적도 없는 사건 아닐까?

유정에게 설명하려 시도 중이지만 애를 먹는 홍설. 네이버웹툰


악착같이 '베낀 증거'를 찾는 이유

손민수가 홍설을 흉내 내고 있다는 사실은 치인트 내에서 크게 세 가지 증거를 통해 공공연한 것이 된다. 하나는 홍설의 친구인 모나가 선물해 준 '이상한 바지'다. 이 눈에 띄는 '이상한 바지'는 홍설이 손민수에게 던진 미끼로, 손민수가 다른 누구가 아니라 정확히 홍설을 복제하고 있음을 폭로하는 강력한 심증으로 기능한다. (3부 15화).

둘째는 홍설이 남자친구인 유정에게 선물 받은 '사자 열쇠고리'다. 홍설은 어느 날 이 열쇠고리를 잃어버리고, '우연히' 열쇠고리를 주운 손민수는 이를 이상하리만치 악착같이 홍설에게 돌려주지 않는다(3부 12화).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열쇠고리의 실질적·상징적 가치가 아니다. 손민수의 훔치는 능력만이 문제가 된다. 만약 손민수가 열쇠고리를 훔치고 자기 것인 척할 수 있다면, 다른 것들에게는 왜 그렇게 할 수 없겠는가?

셋째는 홍설의 자료를 고스란히 '복붙'(복사, 붙여넣기)한 손민수의 PPT 발표다. 손민수의 PPT가 원래 자기 것이었음을 주장하는 과정에서 홍설이 결정적인 증거로 제시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오타'다. 오타는 마치 지울 수 없는 지적 노동의 지문처럼 손민수의 PPT에 묻어 있다. 마치 머리 모양과 옷차림은 베낄 수 있어도 홍설 자신의 독창적인 아이디어 자체는 베낄 수 없다고 경고라도 하는 것처럼. 결국 마지막 이 한 방으로 크게 망신을 당한 손민수는 홍설의 스타일을 따라 하는 것을 포기하게 된다.

홍설이 자기 자리를 손민수가 차지해 버리는 악몽을 꾸는 장면. 네이버웹툰 캡처


복제 가능한 존재가 되는 불안감

홍설은 '머리채를 잡는' 결말을 감수하면서도 손민수가 자신을 '물어뜯었다는' 정황을 남들이 볼 수 있는 증거로 만들고자 했다. 손민수가 자기 자리를 대체하는 악몽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이처럼 손민수는 홍설을 내부로부터 파괴한 최초의, 아마도 유일한 인물일 것이다. 왜 홍설은 손민수로부터 그토록 큰 위협을 느꼈을까? 유정이 손민수에게 비아냥거린 것처럼 "아무리 흉내 내고 발버둥 쳐도 그 본인이 될 수도 다가갈 수도 없"다면 말이다(3부 41화).

홍설이 그녀를 두려워하는 까닭은, 바로 자기가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어떤 독특한 속성들이 다른 누군가에게 복제될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이다. 손민수는 모방 행위를 통해 홍설을 복제 가능한 것, 흉내 낼 수 있는 표본으로 전락시켰다. 여기서 오는 불안은 단순히 자기의 독특한 개성이 손민수 같은 여자에게 침범당했다는 분노보다 더 무시무시한 것이다.

그것은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여성적인 기표란 아무것도 없다는 실존적인 충격이다. '비슷비슷한 여자들의 옷'들은 언제든 서로 교환되고 이를 통해 순환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여자들 사이에서 뺏고 빼앗길 만한 특별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허무하고 치명적인 결론에 이르게 된다. 남는 것은 '손민수하다'라는 동사뿐이다.

손민수가 활약하는 치인트의 3부가 유독 흥미로운 이유는, 단연 강력한 안타고니스트로서 극을 이끄는 손민수라는 인물의 능동적인 욕망 때문이다. 그런 손민수에게 영향을 받고 결국 사생결단을 감행하는 홍설 역시도 이 '여성 간 절도'의 파괴성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니 손민수에게 가해진 결말이 통쾌한 만큼, 우리 역시 가지고 있지도 않은 무언가를 빼앗기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면 될까.


이연숙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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