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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걸 본 적 없던 중증환자...놀랍게도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입력
2022.02.01 09:00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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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양미라 간호사

편집자주

의료계 종사자라면 평생 잊지 못할 환자에 대한 기억 하나쯤은 갖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생명을 구한 환자일 수도 있고, 반대로 자신에게 각별한 의미를 일깨워준 환자일 수도 있다. 아픈 사람, 아픈 사연과 매일 마주하는 의료종사자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나는 캐나다에서 ‘너싱 홈(nursing home)’이라 불리는 돌봄 시설에서 일하는 간호사다. 병원이 특정 질병이나 증상을 치료하는 곳이라면, 이곳은 치매환자나 완치가 어려운 환자들, 독립적 생활이 가능하지 않은 노인들이 전문적이고 일상적 건강관리와 돌봄을 받으며 거주하는 시설(long term care facility)이다. 간호사와 돌봄 인력들이 교대 근무를 통해 24시간 상주하고 있다.

그날 나는 오후 2시부터 밤 10시까지 근무하는 일정이었다. 사람에 따라 하루에 적게는 한 번, 많게는 네 번까지 투약이 이루어지는데, 그중 취침 무렵의 마지막 투약 시간이었다.

J는 너싱 홈에서 살기에는 비교적 젊은 59세 남성이다. 파킨슨병을 비롯해 여러 병을 진단받았으며, 식사와 배변, 모든 거동에서 전적인 도움을 받아야 하는 환자다.

나는 J에게 약을 준 뒤, 다음 환자에게 가기 위해 카트를 밀며 복도를 지나가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소리가 들렸다. 난 반복되어 들려오는 그 소리를 따라 복도를 되돌아갔다. J의 방이었다.

꽤 오랜 기간, 하루에도 몇번씩 J의 얼굴을 마주해왔지만 난 한 번도 그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그가 목소리를 가졌다는 사실에 놀랐고, 그가 내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더욱 놀랐다.

나는 그가 왜 목소리가 없다고 생각했을까. 왜 내 이름을 당연히 모를 거라 생각했을까. 순간 뇌성마비 환자들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그들의 불편한 신체를 보고 지능마저 낮을 것이라고 잘못 인식한다고 하지 않는가. 그들도 보통 사람들과 똑같이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데도 사람들은 당연히 아닐 것이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J가 앓고 있는 파킨슨병은 신경계 이상으로 인해 손이 떨리고 신체가 뻣뻣해지는 등 주로 움직임 기능에 영향을 주는 질병이다. 말이 어눌해지는 증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J는 파킨슨병 외에도 여러 복합적 요인으로 인해, 휠체어에 앉아 식사 보조를 받을 때 고개를 고정시키는 장치를 해야 할 정도로 스스로 몸을 가누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인지기능이 손상된 건 아니다. 자신이 받는 모든 돌봄의 내용들에 대해 나름 선호하는 방식을 갖고 있고, 그것이 달라질 때마다 좋고 싫음의 의사표시를 분명히 할 수 있다. 나중에 알아보니 실제 J는 결코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힘겹게 표현하는 자신의 말이 상대에게 잘 전달이 되지 않을 때, 그 언짢음이 싫어서 매우 제한된 사람들에게만 말로 의사표시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그가 내 이름을 아는 것도 신기한 일은 아니었다. J는 주변 사람들이 나를 부르는 것을 듣고, 당연히 내 이름을 알았을 것이다. 나는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한편으론 내 이름을 불러준 그가 고맙고, 감동스러웠다.

그날 밤 J가 내 이름을 부르며 나를 찾은 이유를 지금도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그는 부자연스러운 손가락을 움직여 내게 무언가를 전달하고자 하였지만, 나는 잘 알아내지 못했다. 그저 짐작되는 대로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았지만, 그중 하나라도 그가 원하는 걸 충족했는지는 확신하지 못한 채 그의 방문을 나서야 했다.

그렇다 해도 자의식이 강한 J가 내 이름을 부른 것은 혹시 내게 ‘말을 트는’ 하나의 시작점이 아니었을까. 그날 이후 비로소 그와 나 사이에 하나의 ‘관계(therapeutic relationship)’가 형성된 느낌이 들었다. 단지 정해진 시간에 약을 주고, 드레싱 같은 필요한 처치를 하며, 건강에 관한 전반 상황을 체크하는 등 업무를 수행하는 대상으로서만이 아니라, 서로 인정하고 신뢰가 바탕이 되는 그런 관계 말이다.

사소하지만 내 가슴속에 느낌표 하나를 만들어 낸 그날의 ‘호명사건’은 이후 내게 작은 변화를 가져왔다. J뿐만 아니라 31명의 다른 이들을 대할 때면, 그들이 표현은 하지 않아도 ‘나는 네가 지금 나를 어떤 마음으로 대하는지 다 안다'고 쳐다보는 것 같아, 늘 경각심을 갖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호소하는 크고 작은 통증이나 불편함, 감정, 그리고 자잘한 요구들을 대할 때 나의 태도를 다시 설정하게 해주었다. 그들이 요구하는 것, 표현하는 것 하나하나가 그들에겐 너무도 중요하고 절박한 것이란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당시 나는 많은 일들을 바쁘게 처리해내기 급급한 현실에서 살고 있었다. 그날 저녁, J는 나의 이름을 불렀고, 나는 저만치 달아나 있던 초심을 다시 불러올 수 있었다.

캐나다 Parkwood Senior Community LTC 근무

캐나다 Parkwood Senior Community LTC 근무

※잊지 못할 환자에 대한 기억을 갖고 계신 의료계 종사자분들의 원고를 기다립니다. 문의와 접수는 opinionhk@hankookilbo.com을 이용하시면 됩니다. 선정된 원고에는 소정의 고료가 지급되며 한국일보 지면과 온라인페이지에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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